항목 ID | GC094005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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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昌原 進禮山城 |
영어공식명칭 | Jinrye Mountain Fortress |
이칭/별칭 | 진례성,진례산성,김해 진례성,김해 진례산성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창원시 성산구 토월동 |
시대 |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
집필자 | 안성현 |
문화재 지정 일시 | 1993년 12월 27일 - 창원 진례산성 경상남도 기념물 제128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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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창원 진례산성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 삭제 |
현 소재지 | 창원 진례산성 -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창원시 성산구 토월동 |
성격 | 입보용 산성 |
양식 | 포곡식 석축 산성 |
크기(높이,길이,둘레) | 4,700m[둘레] |
면적 | 806,234㎡ |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과 창원시 성산구 토월동의 경계 비음산에 있는, 통일 신라 시대에 축조하였다고 추정하는 석축 산성.
[건립 경위]
창원 진례산성(昌原 進禮山城)의 축조 시기와 주체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으나, 현재까지 축조 시기와 목적에 대해 의견 일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진례성(進禮城)에 대한 문헌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와 「열전」 견훤조에 실린 것이 가장 이른 것이다. 기사에 의하면, 920년(경명왕 4) 후백제와 견훤이 보기(步騎)[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여 무너뜨린 다음 진례성으로 나아가려고 하였는데, 신라 왕이 아찬 김율을 고려 태조에게 보내어 구원을 청하니 태조가 군대를 내어 구하려 하자 견훤이 이를 듣고 물러갔다고 한다. 또한 『고려사(高麗史)』 태조 세가에서는 “견훤이 대량(大良)과 구사(仇史) 두 군을 점령하고 진례군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진례성이 기록된 조선 시대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진례성은 김해부 읍치(邑治)의 서쪽 35리[13.75㎞]에 있으며, 통일 신라의 김인광(金仁匡)이 진례성제군사(進禮城諸軍事)였다. 전하기를, 수로왕이 아들 하나를 진례성주로 삼고 왕궁과 태자단, 첨성대를 설치하였는데 아직 그 유지가 남아 있으며, 경성 안이라고 칭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진례성을 통일 신라 때 축성하였고, 김인광이 거주하였으며, 다양한 시설이 있었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다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이 편찬될 무렵에는 이미 폐성이 되어 옛 터만 남아 있었으며, 진례산성을 지칭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발굴 조사에서 밝혀진 내용을 보면, 진례산성의 규모와 성벽의 축조 수법이 통일신라 시대까지 소급되기는 어렵다. 특히 문 터에서 출토된 ‘봉림사‘ 명문 기와는 봉림사가 폐사된 이후에 가져다 사용하였음을 시사한다.
이와 달리 『삼국사기』 기사를 근거로 진례성을 진례산성으로 보는 견해가 다수이며, 발굴 조사를 통해 정확한 시기와 목적을 밝혀야 한다.
[위치]
창원 진례산성은 김해시 진례면과 창원시 성산구 토월동의 경계를 이루는 비음산(飛音山)[510m]과 서쪽 곡부를 두른다. 진례성은 통일 신라 후기의 후삼국 쟁패기에 후백제가 경상도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요충지였다. 따라서 후백제와 신라, 그리고 후백제의 군사적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신라를 도와주었던 고려에게도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김해, 무주(茂朱), 청도(淸道) 오례산성(烏禮山城) 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어 있다.
[형태]
포곡식(包谷式) 석축 산성으로, 둘레는 4,700m이고 면적은 80만 6,234㎡이다. 비음산에서 발원하여 북류하는 계곡을 따라 축조되어 있다. 북쪽으로는 창원시 동읍을, 남쪽으로는 진해만을, 동쪽으로는 김해시 진례면을, 그리고 서쪽으로는 창원시와 마산만을 조망할 수 있는 요지이다. 이 형태는 험산대성(險山大城)에 축조되는 입보용 산성(入保用 山城)과 유사하며, 주변 영현(領縣) 주민들의 피란 성으로 볼 수 있다.
발굴 조사는 성문과 성벽, 내부 건물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성벽은 자연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축조하였는데, 내벽은 구지표를 일정 구간까지 굴착하여 정지한 후 세석과 부식토를 혼합하여 다졌다. 성벽의 규모는 너비 210㎝, 높이 180㎝이다. 성벽은 가로 20㎝~50㎝, 세로 20㎝~40㎝ 내외의 부정형 할석으로 허튼층쌓기를 하였고, 면석 사이의 빈틈에 쐐기돌을 끼워 견고성을 높였다. 상부는 미석 없이 여장을 쌓았다. 이러한 형태의 성벽은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주로 축조된다. 성문은 서문과 남문, 북쪽의 계곡부에 북문을 설치하였다. 북문은 유실되었고, 서문과 남문은 같은 구조이다. 남문 터는 비음산 정상에서 동쪽[김해시 진례면 방향]으로 400m 정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하며, 성 내부에 적대(敵臺)가 설치된 독특한 구조이다. 성문의 규모는 너비가 430㎝이고, 통로부는 폭이 210㎝ 정도이다. 남문 터의 남쪽은 창원시에서 김해시 진례면 쪽으로 향한 고개가 형성되어 있다. 20여 년 전만 하더라도 김해시 진례면에서 남문을 통해 소풍을 왔다고 한다. 통로부에는 기와를 깔았는데, ‘연봉림사(年鳳林寺)’, ‘봉림(鳳林)’, ‘임사(林寺)’, ‘병인(丙寅)’ 등의 명문 기와가 확인되었다. 창원 봉림사가 폐사된 이후 기와를 가져다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유물은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의 것으로 토기와 기와, 옹기, 자기 등이 있다.
[현황]
창원 진례산성은 1993년 12월 27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128호로 지정되었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 「문화재 지정[등록]번호 삭제 및 문화재명 표기 방식 변경 고시」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는 삭제되었다. 현재 성벽은 대부분 무너져 형태만 알 수 있는 정도이지만, 성의 남쪽 부분은 잔존 상태가 양호하다. 특히 북벽이 위치한 계곡의 동쪽 성벽은 계곡 방향으로 돌출시켜 방어력을 높였다. 문 터는 관문으로 추정되는 북문 터와 서문 터 및 남문 터 등 3개소가 남아 있다. 그중 남문 터는 성문의 구조를 잘 보여 주고 있다. 망루 터는 5개소가 확인되었는데, 주로 해발 고도가 주변보다 높은 성우(城隅)에 위치한다. 성 내부에서는 다수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의의와 평가]
창원 진례산성은 『삼국사기』 견훤조에 기록된 진례성으로 비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발굴 조사 결과, 출토 유물과 축조 수법을 참고하면 조선 시대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있어 추후 논의가 필요하다. 현재의 창원 진례산성이 통일 신라 후기의 기록에 등장하는 진례성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이견이 있으며, 창원 진례산성에 대한 정밀 발굴 조사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