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572
한자 會老堂
영어공식명칭 hoelodang
이칭/별칭 숭재,김해 회로당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서상동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백지국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조성|건립 시기/일시 1491년연표보기 - 회로당 건립
이전 시기/일시 1742년 - 회로당 김해 수로왕릉 곁으로 이건
개축|증축 시기/일시 1798년 - 회로당 증축[1798]
개축|증축 시기/일시 1879년 - 회로당 증축[1879]
현 소재지 회로당 - 경상남도 김해시 서상동 지도보기
성격 전통 건축물|유향소
관련 인물 김순손(金順孫)|김일손(金馹孫)|허재(許梓)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 서상동에 있는 조선 전기 유향소 건물.

[개설]

회로당(會老堂)은 15세기에 김해 유향소(留鄕所) 건물로 건립하였으며, 18세기에 김해 수로왕릉(金海 首露王陵) 곁으로 이건되어 재사(齋舍)로 활용되었다.

[건립 경위]

회로당은 복설된 김해 유향소(留鄕所) 건물로, 1491년(성종 22)에 건립되었다. 김일손(金馹孫)이 쓴 「회로당기(會老堂記)」에 따르면 “김해 지역 사람 김순손(金順孫)이 10년 전 옛터에 건립한 것”으로, 김해 지역 원로들이 모이는 곳이자 성종 연간에 복설된 유향소 시설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는 “회로당은 성의 북쪽에 있는데, 1491년 고을의 부로(父老)들이 건립하였다”고 하였다. 두 기록을 종합해 보면, 회로당은 복설된 유향소 건물 이름으로 1491년에 김해 지역 양반들이 건립한 것이다. 김해 지역 양반들은 회로당에서 향음(鄕飮)·사어(射御)·독법(讀法) 등의 활동을 하고, 향촌의 여러 일을 의논하였다. 동시에 매년 봄가을 수로왕(首露王)의 제사도 회로당에서 지냈다. 즉 회로당은 김해 지역 유림들이 향론을 형성하였던 장소로, 성리학적 명분을 쌓으며 향촌 내 양반의 권위를 높이는 동시에 김해 지역 전통을 계승하는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위치]

회로당은 처음에는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 읍치 북쪽에 건립되었으며, 이후 1742년(영조 18)에 김해 수로왕릉 곁으로 이건하였다. 김해 수로왕릉김해시 서상동에 있다.

[변천]

회로당임진왜란으로 서쪽 협실(夾室)을 제외한 대부분이 불에 타 버렸다. 이에 서쪽 협실에 ‘회로당’ 편액을 달고 사용하였다.1742년에는 회로당을 헐어 김해 수로왕릉 곁으로 옮겨 신축하였다. 1792년(정조 16) 김해 수로왕릉에 치제(致祭)하였는데, 이때 많은 관문(關文)이 오고 갔다. 그중 경상도관찰사가 김해부사에게 보낸 「계하관문(啓下關文)」에 회로당과 관련한 내용이 있다. 관문에 따르면, 1698년(숙종 24) 김해부사 허재(許梓)가 매입한 ‘회로당 전답(田畓)’이 있었다고 한다. 허재는 가락국 출신으로 고을을 다스리는 동안 조상의 능을 위해 땅을 마련하여, 전답에서 나오는 돈을 제사와 수리 비용으로 사용하였다. 제사를 고을 사람들이 관장하였으므로 매입한 땅을 고을 사람에게 맡겼고, 땅을 ‘회로당 전답’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점차 고을 사람들이 회로당 전답을 사사로이 사용하였고, 회로당이 왕릉 가까이에 있는 것을 꺼려하여 당의 현판을 향청에다 옮겨 달고 땅 이름을 ‘향둔(鄕屯)’으로 고쳐 기록하였다. 후에 김해부(金海府)에서 왕릉수리위답(王陵修理位畓)으로 양안(量案)[토지 대장]을 고치고, 제사 역시 김해부에 속하게 하였다. ‘회로당’ 편액은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숭재이건기(崇齋伊建記)」에 따르면 1792년에 편액을 ‘숭재’로 개판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후 자료를 살펴보면 ‘회로당’으로 기재한 사료가 더 많다. 1798년(정조 22) 김해 수로왕릉의 정자각을 건설하며 옛 신주(神廚)를 철거하고 새로 세우기로 하였는데, 이때 회로당을 향대청(香大廳) 동쪽에 세웠다고 한다. 칸수와 너비는 종전에 비해 크게 하고 능감(陵監)을 수호하는 재소(齋所)로 활용하였다. 1878년(고종 15)에는 허전(許傳)김해 수로왕릉에 전호를 내려 주고 능관을 설치할 것을 청원하였다. 이후 ‘숭선전’으로 선액되었고, 능침과 사당을 개수하였다. 1879년(고종 16) 「납릉재사중건기(納陵齋舍重建記)」에 따르면 회로당은 5칸으로 확장되었다.

[현황]

회로당김해 수로왕릉으로 이건된 후 ‘숭재’로 개판되었다가 ‘숭선전’으로 선액되었다. ‘회로당’ 편액은 숭선전 내 숭재 안마루 벽면에 걸려 있다.

[의의와 평가]

회로당은 15세기~17세기 김해 지역 유향소 건물로서, 향촌 자치의 공간이자 수로왕에 대한 전통을 계승하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유향소는 사적(私的) 기구로서 그 내력을 밝히는 데 어려움이 많은데, 김일손의 「회로당기」를 통해 조선 전기 김해 지역 유향소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어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회로당은 18세기부터 김해 수로왕릉 곁으로 옮겨 왕릉의 재사로서 제향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조선 시대 전 기간 동안 김해 지역의 유림들은 회로당에서 수로왕에 대한 제사를 올렸는데, 이는 당시 김해 지역 사람들이 수로왕릉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 전통을 계승하였는지 보여 준다.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