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5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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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海 泉谷城 - |
영어공식명칭 | Gimhae Chongok Mountain Fortress |
이칭/별칭 | 신기산성 터,천곡성 터,김해 신기산성 터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터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 망덕리 산10-1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가야,고대/삼국 시대/신라 |
집필자 | 안성현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9년 - 김해 천곡성 터 해동문화재연구원에서 지표 조사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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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13년 - 김해 천곡성 터 두류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조사 실시 |
소재지 | 김해 천곡성 터 - 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 망덕리 산10-1 |
출토 유물 소장처 | 국립김해박물관 - 경상남도 김해시 가야의길 190[구산동 232] |
성격 | 산성 터 |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 망덕리에 있는 금관가야의 목책성 터와 신라의 포곡식 석축 산성 터.
[개설]
김해 천곡성(金海 泉谷城)은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성곽의 명칭만 언급될 뿐, 성의 규모와 축조 재료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일제 강점기 자료에도 ‘천곡성’으로 나와 있으며, 이후 발간된 『문화유적분포지도』에서는 산성의 위치가 같음에도 불구하고 천곡성과 신기산성을 별도의 산성으로 설명하고 있다. 최근 발굴 조사 보고서에서는 신기산성으로 명명하였다.
[변천]
김해 천곡성 터에서는 금관가야의 목책성(木柵城) 터와 내부의 수혈[움] 유구, 신라의 석축성 터와 집석(集石) 유구가 확인되었다. 목책성은 금관가야의 왕성인 봉황토성의 외곽 방어를 위하여 축조되었으나, 남쪽으로 칠산(七山)이 솟아 있다. 이에 따라 조망권이 한정되므로 칠산에도 금관가야의 관방 유적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목책의 나무 기둥 자리에서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으나, 석축 성벽과 관련한 유구 내부에서 6세기 전반경의 토기 조각이 출토되었다. 석축성은 신라가 축조하였다. 신라는 금관가야를 복속한 후 양동산성(良洞山城)과 천곡성을 축조하였는데, 두 산성을 출발점으로 서진을 진행하였다. 천곡성의 축조 목적은 『일본서기(日本書紀)』「흠명기(欽明紀)」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낙동강을 ‘대강수(大江水)’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안정적인 병력과 보급품의 조달이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천곡성의 축조는 방어적인 측면도 있지만, 서진을 위한 병참 기지의 역할이 더 중요한 목적이었다.
[위치]
김해 천곡성 터는 김해시 주촌면 망덕리 산10-1번지에 있다. 산성 터에서 남쪽으로 칠산과 고 김해만(古 金海灣)이 조망되고, 동쪽으로는 김해시의 중심 지역인 내외동과 대성동 일대가 보인다. 서쪽으로는 냉정고개를 거쳐 창원시·함안군·진주시 방면으로 진출하는 교통로를 조망할 수 있다. 또한 북쪽으로는 진례분지(進禮盆地)와 창원시 방면으로 통하는 길목을 관망할 수 있는 군사상의 요충지에 위치한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지표·발굴 조사를 통해 금관가야의 목책성과 6세기 후반 신라가 축조한 석축 산성이 중복된 곳임을 확인하였다. 평면 형태는 부정형에 가깝고, 규모는 530m이다. 한국전력공사 부산·경남개발처에서 시행하는 송전 선로 철탑 부지 및 진입로 공사를 위해 2009년 해동문화재연구원에서 지표 조사를 실시하였는데, 그 결과 천곡산성과 김해 망덕리 고분군(金海 望德里 古墳群) 등 가야 시대의 성곽 및 고분군과 인접한 곳임이 확인되었다. 이에 2013년 두류문화재연구원에서 철탑이 설치되는 남동쪽 모서리 부분에 대해 발굴 조사를 진행하였다. 조사 결과 금관가야의 목책, 수혈 주거지, 수혈 유구와 신라의 석축 성벽, 집석군이 확인되었다.
목책성은 석축 성벽의 내벽 기저부(基底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노출되었다. 내벽에서 50㎝~100㎝ 떨어진 곳에 있으며, 목주혈(木柱穴)의 크기는 직경 50㎝~70㎝, 깊이 30㎝~80㎝이다. 간격은 약 70㎝로 균일하고 진행 방향은 석축 성벽과 유사하다. 목책은 석성을 축조하면서 훼손되었으므로 석축성보다 이전 시기임은 분명하다. 목책성에서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지만, 석축 성벽과 관련한 유물은 6세기 전반에 해당하므로 늦어도 5세기 후반경에 축조되었음을 시사한다.
석축 성벽은 편축식으로 쌓았고 3개 공정으로 나누어진다. 기저부는 풍화 암반을 계단상으로 파서 조성하였다. 성벽은 지형이 낮은 외벽을 쌓아 올리다가 내벽과 같은 높이부터는 내벽과 외벽을 동시에 쌓았다. 외벽은 수직에 가까우며, 가로 30㎝~60㎝, 세로 12㎝~20㎝ 크기의 [장]방형 할석으로 바른 층 쌓기를 하였다. 면석 사이의 빈틈은 잔돌을 끼워 견고성을 높였다. 기단 보축(補築)은 할석과 황갈색 사질 점토를 혼합하여 기저부를 조성한 다음 30㎝~50㎝의 할석으로 면을 맞추었고, 적심은 할석으로 쌓았다. 보축의 외벽은 면석 중 비교적 긴 할석으로 일정 간격마다 세로 쌓기를 하였으며, 보축의 외부는 황갈색 사질 점토를 다져서 보강하였다. 성벽의 너비는 640㎝이고, 기단 보축의 단면 형태는 삼각형이며, 기울기는 70도 정도이다.
내부 시설로는 수혈 주거지 2기와 수혈 2기, 집석 유구 4기가 조사되었다. 주거지와 수혈은 조사 지역 서쪽에 집중적으로 분포하였다. 형태는 대부분이 타원형이며, 수혈 주거지 내부에 2열의 석렬[터널식 구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유물은 수혈 주거지에서 5세기 대의 토기 조각과 석축 성벽 내부에서 6세기 초중반의 토기 조각이 출토되었다.
[현황]
김해 천곡성의 동벽과 북벽은 석축 성벽의 석재가 대량으로 무너져 있는 상태이고, 남벽과 서벽은 석재량이 적어 토성처럼 계단상으로만 존재한다. 현재 성내에는 수목이 우거져 있으며, 간이 운동 시설과 철탑이 조성되어 있다. 출토 유물은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소장하여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김해 천곡성은 금관가야의 목책성과 목책성을 파괴하고 축조한 신라의 석축 산성으로 나누어진다. 목책성은 가야에서 최초로 확인된 사례라는 점에서 금관가야의 관방 체계와 축성에 대한 내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석축 산성은 신라가 낙동강 서쪽에 축조한 가장 이른 시기의 산성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신라의 축성법과 서진 방향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판단된다. 다만, 산성 터의 극히 일부분에 대해서만 조사가 이루어졌으므로 향후 종합 정비 계획을 세워 학술 조사를 진행하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