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6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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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昌寧 曺氏 |
영어공식명칭 | Changnyeong Jossi|Changnyeong Jo Clan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신은제 |
본관 | 창녕 조씨 본관 - 경상남도 창녕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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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거|집성지 | 창녕 조씨 세거지 -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주동리 |
세거|집성지 | 창녕 조씨 세거지 - 경상남도 김해시 불암동 못안마을 |
세거|집성지 | 창녕 조씨 세거지 - 경상남도 김해시 안동 |
성씨 시조 | 조계룡 |
[정의]
조계룡을 시조로 하는 경상남도 김해시의 세거 성씨.
[개설]
창녕 조씨(昌寧 曺氏)의 시조는 조계룡(曺繼龍)으로,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큰딸로 후에 선덕 여왕(善德 女王)이 된 덕만공주(德曼公主)와 혼인하여 부마가 되었다. 창녕 조씨가 본격적으로 관료를 배출한 시기는 고려 후기로 대표적인 인물이 조익청(曺益淸)과 조민수이다. 조선이 건국된 이후 창녕 조씨 집안에서는 저명한 관인과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매계(梅溪) 조위(曺偉)[1454~1503]와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이다.
[연원]
1904년(고종 41)에 작성된 『경상남도 김해군 가호안(慶尙南道 金海郡 家戶案)』에는 하동면[현 대동면] 주동리에 거주하는 28가구 가운데 8가구가 조씨였다. 조선 후기 김해 지역의 대표적인 유학자 중 한 사람이 사우당(四友堂) 조이추(曺爾樞)[1661~1707]로 지금의 김해시 활천동에서 태어났으며, 향약을 보급하며 고을의 풍속을 선도하였다. 『김해부읍지(金海府邑誌)』[1832] 인물조에는 조이추의 동생인 조이극(曺爾極)과 조이추의 아들 조한령(曺漢齡), 1672년(현종 13) 무과에 급제하여 강동현감을 지낸 조이량(曺爾樑)의 손자 조몽징(曹夢徵)의 이름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기록으로 볼 때, 창녕 조씨 일문은 조선 후기 이래 김해 일대의 유력한 사족으로 성장하고 활약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입향 경위]
창녕 조씨가 김해에 입향하게 된 시기와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지만, 조식이 1530년(중종 25) 30세 때 어머니를 모시고 처가가 있는 김해 신어산 아래 탄동(炭洞)으로 내려와서 살 즈음 김해 지역에 입향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식은 김해에서 17년 정도 살다가 고향인 삼가현 토동[현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으로 돌아갔다. 당시 창녕 조씨가 주로 세거하던 곳은 돗대산 좌우 지역으로 조식이 강학한 김해 산해정(金海 山海亭)이 있는 대동면의 주동리와 주중리 일대, 그리고 안동과 불암동 일대였다.
[현황]
창녕 조씨는 김해시의 지내동 못안마을과 안동, 대동면 주동리 성안마을 등지에서 세거하고 있다.
[관련 유적]
조식이 후학을 양성하고 유학자들과 교류하기 위하여 세운 김해 산해정이 김해시 대동면 주동리에 있다. 김해시 삼방동에 있는 예암서원(禮巖書院)에서 조이추를 배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