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7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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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許雄 |
영어공식명칭 | Heo Woong |
이칭/별칭 | 눈뫼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종순 |
출생 시기/일시 | 1918년 7월 26일 - 허웅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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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32년 - 허웅 김해공립보통학교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38년 - 허웅 동래공립고등보통학교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9월 - 허웅 광신상업고등학교 교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947년 - 허웅 한성고등학교 교사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947년 9월 - 허웅 부산대학교 교수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957년 5월 - 허웅 서울대학교 교수 부임 |
활동 시기/일시 | 1984년 - 허웅 국민훈장 모란장 수여 |
활동 시기/일시 | 1990년 - 허웅 세종문화상 수상 |
몰년 시기/일시 | 2004년 1월 26일 - 허웅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2004년 - 허웅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 |
추모 시기/일시 | 2021년 11월 9일 - 김해한글박물관 개관 |
출생지 | 경상남도 김해시 동상동 |
수학|강학지 | 김해공립보통학교 - 경상남도 김해시 호계로500번길 15-15[동상동 534] |
수학|강학지 | 부산대학교 -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산대학로63번길 2[장전동 40] |
수학|강학지 | 연세대학교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세로 50[신촌동 134] |
수학|강학지 | 서울대학교 - 서울특별시 관악구 관악로 1[신림동 산56-1] |
묘소|단소 | 모란공원묘지 -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경춘로2110번길 8-102[월산리 606-1] |
성격 | 학자 |
성별 | 남 |
본관 | 양천 |
대표 관직|경력 | 서울대학교 교수 |
[정의]
경상남도 김해 출신의 국어학자.
[개설]
허웅(許雄)[1918~2004]은 최현배의 영향을 받은 국어학자이다. “한 나라의 말은 그 나라의 정신이며, 그 겨레의 문화 창조의 원동력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또한, 우리 말·글의 중요성을 깨닫는 데서 나아가 ‘실천’이 중요함을 강조하며 평생을 한글 연구와 보급에 힘썼다.
[가계]
허웅은 1918년 7월 26일 지금의 경상남도 김해시 동상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양천이고, 호는 눈뫼이다. 아버지는 허수(許洙), 어머니는 윤영순이며, 5남 2녀 중 셋째 아들이다. 1942년 12월 백금석과 결혼하여 2남 4녀를 낳았다. 첫째 아들 허황은 울산대학교 화학과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막내 아들 허원욱은 허웅의 학문을 이어받아 문법론을 전공한 학자이다.
[활동 사항]
허웅은 1932년 김해공립보통학교[현 김해동광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동래공립고등보통학교[현 동래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당시 허웅은 럭비와 축구 선수로 활동할 만큼 활발하고 건강하였지만, 2학년 때 폐결핵에 걸려 1년간 휴학하였다. 이후 건강을 회복한 후 복학하여 1938년 졸업하였다. 최현배의 『우리말본』의 영향을 받아 1938년에 최현배가 재직하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다. 입학 후 학우들과 『우리말본』을 읽으며 비밀 독서 모임을 가졌다. 그러나 최현배가 일제의 압박으로 파직당하자 1939년에 학교를 중퇴하였다. 이후 혼자 공부하기로 결심한 후 고향 김해로 내려왔다. 허웅은 이때부터 15세기 국어 문법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1943~1945년에는 일제 징용을 피해 창원의 사설 강습소에서 교편을 잡았고, 김해 읍내 산업조합의 서기를 맡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하자 김해에 한글 강습소를 열어 우리말과 우리글 보급에 힘썼다. 1945년 9월 광신상업고등학교 교사, 1947년 한성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1947년 9월부터는 부산대학교를 시작으로, 성균관대학교, 연세대학교의 교편을 잡았다. 그리고 1957년 5월부터 1984년 2월까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교수로 재임하였다. 퇴임 후 연세대학교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중국 상하이외국어대학 명예교수 등을 지냈으며, 초등학교 한자 교육 반대, 한글날 공휴일 제외 반대, 한글전용법 폐기 반대 등에 앞장섰다. 2004년 1월 26일에 사망하였다.
허웅은 평소 고향 김해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글을 자주 남겼다. “나는 내 고향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자랐다. …… 첫째 자랑거리는 거기가 옛 서울이라는 것 …… 넓은 김해평야에 누른 벼가 익어 갈 때면, 나는 만장대에 올라 그 금빛 벼바다를 내려다보며 그 사이를 누비고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 줄기에 내 어린 낭만을 적셔보기도 했다.”[『농민신문』, 1979. 4. 2.]
[학문과 저술]
허웅은 과학적 방법으로 국어의 본질을 연구하여 국어에 깃든 민족 문화의 바탕을 밝히려 하였다. 실증적 자료를 바탕으로 국어의 구조를 찾는 연구 방법을 택하였으며, 주시경·최현배의 한글 이론부터 유럽의 이론까지 두루 참조하였다. 중세 국어에서 현대 한국어에 이르는 넓은 범위를 연구하였으며, 음운론·형태론·통사론 등의 분야는 물론, 언어 정책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다루었다. 국어 연구를 언어 과학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63년에 출간한 『언어학개론』[정음사]은 한국 최초의 언어학 개론서로서 언어학자, 국어학자들에게 지침이 되었다. 이외에 『우리 옛말본-15세기 국어 형태론』[샘 문화사, 1975], 『국어 음운학-우리말 소리의 오늘 어제』[샘 문화사, 1985], 『16세기 우리 옛말본』[샘 문화사, 1989] 등을 저술하였다.
[묘소]
허웅은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모란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허웅은 1973년 외솔상, 1984년 국민훈장 모란장, 1986년 성곡학술문화상, 1990년 세종문화상, 1993년 주시경학술상, 1998년 세종성왕대상, 2000년 자랑스러운서울대인상, 2002년 연세문인상을 수상하였으며, 2004년에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받았다.
한글학회에서 해마다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으며, 경상남도 김해시에서는 해마다 눈뫼허웅선생추모한글사랑공모전을 개최한다. 2015년에는 허웅 생가터[경상남도 김해시 분성로 345-22]에 동상동민 명의로 표지석을 세우고, 추모 행사를 열었다. 2018년 10월 19일에는 눈뫼허웅선생탄생100주년기념식 및 제2회 한글세미나가 김해문화원에서 열렸다. 김해시에서는 2021년 한글날에 맞추어 김해 출신 한글학자 이윤재와 허웅의 업적을 기리고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기 위해 김해한글박물관을 개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