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화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1377
한자 文人畵
이칭/별칭 남종화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근대/근대,현대/현대
집필자 김연진

[정의]

개항기 이후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 직업 화가가 아닌 문인이 그린 그림.

[개설]

문인화란 화가가 아닌 문인들이 학문을 익히고 정신을 수양하며 마음을 다스리고자 즐겨 그렸던 그림을 말한다. 중국 명나라 만력연간에 막시룡(莫是龍)[1537~1587], 진계유(陳繼儒)[1588~1639], 동기창(董其昌)[1555~1636] 등이 당나라 이후 그림 중 문인 출신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남종화’, 또는 ‘문인화’로 칭하고, 전문 적업 화가들이 그린 그림을 ‘북종화’로 구분하였다. 문인화는 사물의 외형을 꼼꼼하게 그리기보다는 마음속 사상을 표현하는 것을 더 중시하였기 때문에 대부분 먹을 사용해 간략하게 그린 후 옅게 채색하였다.

우리나라 문인화는 중국과 달리 문인이 그린 그림이면 남종화법이 아니어도 문인화로 분류하는 경향이 있다. 즉 화풍이나 화법보다는 그림을 그린 사람의 신분에 의해 분류한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나라에는 고려 시대 남종화가 유입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조선 전기까지는 큰 유행을 하지 못하다가 조선 후기에 크게 성행하였는데, 사군자화나 묵죽화, 매(梅)·난(蘭)·국(菊)·죽(竹) 등을 주로 그렸다. 조선 후기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 자하(紫霞) 신위(申緯)[1769~1845],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 등이 대표적이다. 김해 지역 문인화는 조선 후기 차산(此山) 배전(裵婰)[1843~1899]과 배전의 제자 우죽(又竹) 배병민(裵秉民)[1876~1936], 김종대(金鍾大)[1873~1949]에 의해 영남 지역 문인화가 형성되었으며, 현대의 수암(修菴) 안병목(安秉穆)[1906~1985], 운정(雲丁) 류필현(柳弼鉉)[1925~2000] 등으로 이어졌다.

[김해 지역 문인화의 발전]

김해 지역의 문인화는 조선 후기 한국적인 남종 문인화풍을 계승한 배전으로부터 시작하였다. 배전은 개항기 고종(高宗) 때 선전관을 지냈으며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이하응(李昰應)과 교유했던 친형 배환을 통해 흥선대원군의 문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壬午軍亂)과 1884년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일어나면서 김해에 칩거하게 되었는데, 당시 김해는 영남의 문인들이 모여 강학과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등 시·서·화가 발전한 곳이었다.

배전은 필획이 단정하고 먹색이 담박한 조선 후기 문인화를 계승하였다. 배전의 「묵죽도」나 「묵매도」 등을 보면 조선 후기 강세황의 특징을 계승한 것을 알 수 있다. 또 흥선대원군의 문하에서 김정희의 서화에 대한 필법도 익혀 「묵란도」 등에서는 난엽의 굵고 가는 변화에서 흥선대원군이나 김정희와의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배전의 「묵죽도」는 신위의 묵죽화풍과 유사하여 한국 전통 문인화를 고스란히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일제 강점기를 거쳐 우리나라에 새로운 화풍이 들어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김해 지역은 배전을 중심으로 전통 문인화를 계승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배전의 직제자이자 김종대와 함께 김해 문인화의 중추적 위치에 있던 배병민배전의 자식과도 같은 존재였다. 배병민배전과 함께 김해 신어산 서림사[현 은하사] 취운루에서 1897년(고종 34)에 지은 시가 시판으로 남아 있다. 배병민에 관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1924년 2월 4일 『매일신보』에 “명화가 배우죽 씨를 초대하여…”란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문인화의 중심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배병민문인화배전보다 더 과감한 묵필법을 구사하며 농담의 변화가 적고 각이 지며 거침없이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배병민과 함께 근대 김해 지역 문인화를 이끈 김종대는 외종조 할아버지인 배전으로부터 시문과 서화의 기초를 닦았고,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문용에게 서예를 지도하는 등 서화 예술에 대한 감각을 일찍부터 키워 나갔다. 1904년(고종 41)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아갔으나 1906년 고종(高宗)의 단발령에 불복하고 김해에 낙향한 후 영남의 선비들과 서화로 교우하였다. 말년에는 김해 한림 수조리에 거연정(居然亭)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며 시와 글씨를 남겼다. 김종대문인화는 맑고 담박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김종대의 매·난·국·죽 그림은 조선 후기 강세황과 심사정(沈師正)[1707~1769]의 한국적인 남종화풍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 이는 김해 문인화의 특성이기도 하다. 김종대는 서예에도 뛰어났지만 특히 사군사화는 김해 문인화의 전형적인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이러한 특성은 제자 안병목에게 이어졌다.

안병목김종대에게 서화를 배웠다. 특히 안병목은 서화를 수장한 것뿐 아니라 비평에도 뛰어나 『수암집(修巖集)』 등에 100여 수의 자작시를 싣기도 하였다. 맑고 담박한 수묵 처리와 전아한 필획, 화면 구성력 등은 배전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김해 화맥의 특징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안병목의 「묵죽도」는 전통적인 화법을 종합하면서도 묵의 농담 변화를 확연히 드러내며 생동감 있는 표현이 특징이다. 안병목문인화류필현과 한산당(寒山堂) 화엄선사(華嚴禪師)에게 이어져 현대 김해 문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김해 지역 현대 문인화류필현과 화엄선사로 대표된다. 류필현은 「묵포도」를 특장으로 삼은 화가이다. 어려서부터 글씨와 그림을 좋아했으며 사군자 외에도 소나무, 목단, 수련, 묵포도 등 문인화의 소재를 폭넓게 구사하였다. 또 김해 지역 전통문화의 복원과 계승, 발전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안타깝게 류필현의 작품은 자료가 부족하지만 남아 있는 작품을 볼 때 전반적으로 구도나 먹색의 농담 변화가 거의 없는 김해 문인화의 특징을 계승하고 있다. 화엄선사는 김해를 중심으로 서예·사군자화나 「달마도」와 같은 선종화를 그리며 활동한 선승화가였다. 김해 신어산 영구암과 동림사에 지내며 달마도를 주로 그렸으며, 한국 선종화 분야에서 독보적인 경지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의의 및 평가]

김해 지역 문인화는 조선 후기 전통적인 문인화를 계승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한국 근대 미술은 전통의 단절과 새로운 화풍의 유행이라는 큰 변화를 맞이하였다. 서울 중앙의 전통 화단은 큰 변화를 겪었으나 영남 지역에서는 사군자화, 묵죽화 등 전통적인 문인화 창작이 오히려 발전하였는데, 이는 김해 지역 문인 화가의 활동이 큰 역할을 하였다. 특히 배전-김종대·배병민-안병목-류필현·화엄선사로 이어지는 사승 관계가 명확한 점도, 조선에서 근대와 현대로 이어지는 한국 문인화 형성 과정과 발전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