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002
한자 金海- 金海平野-
분야 지리/자연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하지영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 낙동강 하구에 발달한 김해평야가 현대 산업 사회에서 공장과 아파트의 난립으로 사라져 가고 있는 현실.

[개설]

전통 시대 농경 사회에서 개간, 제방 공사를 통해 조성된 김해평야는 광복 이후 농지 개혁6·25전쟁, 1950년대 원조 경제, 1960~70년대 급격한 근대화·산업화 과정에서 공장과 아파트 등이 건설되면서 점점 사라지고 있다. 특히 1976년 김해평야의 중심인 당시 김해읍 대저동에 김해국제공항이 들어선 이후 대저읍과 명지면, 가락면, 녹산면 등이 차례로 부산으로 편입되고, 부산광역시에 의한 서부산권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김해평야는 급속도로 축소되었다.

[강은 흙을 실어 땅을 만들다]

부산에서 구포다리를 건너 조금만 가면 눈앞에 시원스럽게 펼쳐지는 들판을 만날 수 있다. 영남 제일의 곡창 지대인 김해평야이다. 낙동강 하구 천혜의 삼각주 지대에 발달한 김해평야는 강원도 태백시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이 약 500㎞의 산지와 들판을 흘러 내리면서 가져온 토사가 쌓여 조성된 한국 최대의 퇴적 평야이다.

영남 내륙을 가로질러 온 낙동강은 창녕에서 경상남도로 들어와 황강(黃江), 남강(南江) 등과 합류하며, 김해에 이르러서는 북쪽 시계(市界)를 따라 내려오다가 지금의 부산광역시 하단동에서 남해로 흘러든다. 낙동강의 가장 큰 특색은 하상(河床)의 경사가 완만하다는 것이다. 낙동강 하류 쪽의 경사는 특히나 더 완만해 낙동강은 하상이 하천 주변의 토지보다 높은 한국의 대표적인 ‘천정천(天井川)’이기도 하다. 하나의 물줄기로 내려오던 낙동강은 하류에 이르러 여러 개의 물줄기로 갈라지는데, 이들 물줄기를 중심으로 토사가 집중적으로 쌓이면서 여러 개의 하중도(河中島)를 형성하였다. 낙동강 삼각주의 하중도는 몇몇 낮은 구릉을 제외하면 평균 고도가 5m 이하인 해면에 가까운 수준의 평탄한 평지였는데, 대저도(大渚島)와 둔치도(屯致島), 덕도도(德道島), 맥도(麥島), 일웅도(日雄島), 을숙도(乙淑島) 등이 그것이다.

약 1만 년 이상의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평균 60~80m 이상의 두꺼운 두께로 퇴적된 낙동강 삼각주의 토지는 비옥하면서도 배수가 좋은 사질토로 덮여 있다. 규모는 남북으로 약 30㎞에 이르며, 너비는 좁은 부분이 약 6㎞, 넓은 부분은 약 16㎞에 이른다.

[제방과 수로로 농토를 넓히다]

낙동강 삼각주에 형성된 김해평야는 지금의 부산광역시 구포 부근까지 들어왔던 만(灣)이 낙동강 토사로 메워져 형성된 곳으로 퇴적이 진전되면서 저습지나 습지로 바뀌었다. 애초 농경은 불가능하였고, 조개 등 어패류만 채취할 수 있었던 곳으로 조선 후기까지도 홍수로 인한 잦은 범람과 관수·배수의 어려움이 커 갈대가 무성한 습지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역설적이지만 잦은 홍수로 퇴적물이 쌓인 토지는 풍부한 농업 생산력을 가지고 있었다. 저습지가 농사에 적합한 비옥한 충적토(沖積土)로 바뀔 수 있다는 얘기인데, 수시로 범람하는 홍수만 적절하게 관리할 수 있다면 좋은 농토가 될 곳이었다.

개항 이래 조선으로 건너와 부산·마산·김해 등지에 정착한 일본인들은 낙동강 하류 지역의 저습지와 미간지를 집중적으로 매입하였다.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지금의 김해시 회현동 일대에 김해농장을 설치한 데 이어 일본인 무라이 기치베[村井吉兵衛]는 진영과 창원 일대에 무라이농장[村井農場]을 건설하였다. 대저·덕도·명지 등 오늘날의 부산광역시 강서구 일대의 토지는 일본인들의 진출이 특히 집중된 곳이었다. 대저의 경우 당시 김해군 내에서도 일본인 거주자 수가 가장 많은 곳이었는데, 1904년 일본인 도가와 카메키치[戶川龜吉]가 대저면 출두리(出頭里)에서 농업 경영을 시작한 이래 1906년에는 일본 이주민들이 섬 전체의 2/3를 차지할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이곳에 정착한 일본인들은 주로 벼농사에 종사하였고, 대저도 북쪽 지역은 과수원으로 개발해 배농장을 대거 경영하기도 하였다.

수시로 범람하는 낙동강 하류 연안에서 농사를 짓기 위해 ‘물’ 문제는 필수적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였다. 특히 ‘이앙법’이 널리 사용되고 재래종보다 물을 많이 필요로 하는 다수확 품종이 보급되면서 ‘물’은 더욱더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조선 시대 이래 김해 지역에서도 제언(堤堰)과 보(洑) 등 전통적인 수리 시설이 축조되기는 했으나 일본인들은 이 외에 새로 수리 조합을 건설해 ‘물’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수리 조합은 농지에 대한 관개용 저수지나 제방의 축조와 관리, 토지 개량 사업, 수해 예방 사업 등을 목적으로 그 지역의 토지나 가옥의 소유자들이 모여서 조직한 법인체​이다. 김해의 일본인들은 김해수리조합[1912], 대저수리조합[1916], 하동수리조합[1920]을 차례로 건설해 제방을 쌓고 급수·배수 시설을 설치해 미간지를 개간하는 한편 홍수를 방지하는 관개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동강 하류 지역의 홍수는 계속되었다. 1916년에 이어 1919년, 1921년, 1925년까지 반복된 홍수로 제방은 붕괴되었고, 전답은 침수되거나 매몰되었다. 1925년의 대홍수는 낙동강 하류 지역 주민들의 터전을 송두리째 앗아갈 만큼 큰 재난이었다. 가락면 일대와 대저면 일대의 피해가 특히 심했는데, 경상남도 지역 벼농사 수확량이 약 18만 석 이상의 손해를 볼 것으로 예상하는 가운데 김해에서만 4만 석 이상의 피해가 있을 것으로 예측되었다. 1933년 홍수 때는 대저면의 제방이 터지면서 대저평야가 침수되었고, 가락면 수리 조합 구역과 하동면 일대가 물에 잠겼다. 비가 그치고 모습을 드러낸 전답은 처참했는데, 모가 썩는 냄새로 김해평야를 가득 채워 코를 들지 못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1925년의 대홍수로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자 조선총독부는 낙동강 전체에 대한 개수 사업을 진행하였다. 조선총독부 내무국 토목과 초량출장소 직영 사업으로 1926년부터 시작된 낙동강 개수 공사의 가장 중요한 구간은 하류부였다. 이는 밀양군 하남면 부근에서부터 강바닥을 넓히고 강 주변으로 인공 제방을 쌓는 공사였는데, 특히 대저면 주위의 두 갈래 물줄기를 하나로 흐르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른바 ‘낙동강 일천식(一川式) 개수 공사’였다. 이를 위해 1935년에는 지금의 구포역 상류 대동에 커다란 갑문을 장치해 물줄기가 김해 선암 쪽으로 흐르는 것을 봉쇄하였고, 낙동강 하구의 녹산에는 수문을 설치해 바닷물이 서낙동강으로 유입되는 것을 막았다. 이로써 대저·가락·명지·녹산 등의 낙동강 삼각주에 홍수의 피해를 입지 않는 비옥하고 광활한 농경지가 새로 만들어졌다. 지금의 김해평야는 이렇게 해서 조성되었다.

[공장과 아파트가 평야를 점령하다]

광복 이후 농지 개혁6·25전쟁, 1950년대 원조 경제 등을 거치면서 국내 경제는 상당한 변화를 겪었으나 김해 지역은 전통적인 농업 중심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1960~1970년대 박정희 정권에 의한 경제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김해 지역의 산업 구조도 점차 변화에 직면하였다. 경제의 비약적 발전, 산업 구조의 고도화, 이에 따른 인구 집중 등으로 산업화·도시화가 야기되면서 김해의 도시 공간은 외곽으로 확장되어 갔다. 도심과 가까운 안동에는 공업 단지가 들어섰고, 내외동과 장유동 등지에는 사람들의 거주 공간으로 신도시가 조성되었다. 이렇게 조금씩 확장되어 간 김해의 도시 공간은 김해평야를 잠식하기 시작하였다.

1968년 방적 공장인 한일합섬 김해공장이 건설된 것은 안동공업단지의 조성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김해평야 북쪽 끝자락, 들판이 환하게 내려다보이는 경사지 삼안동에 자리잡은 한일합섬 김해공장은 명지면 출신의 김한수(金翰壽)가 창업한 회사였다. 1967년 마산에 합성 섬유 생산 공장을 설립한 김한수는 이곳에서 생산한 캐시밀론이 인기를 얻자, 1968년 1월 김해에 공장을 건설하며 경영을 확장하였다. 한일합섬 김해공장은 농업 위주였던 김해의 생산 기반을 공업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그 인근에 한영요업[1973], 한국스핀돌[1974] 등의 기업체가 입주하면서 안동 일대는 공업 지대로 변화하였다. 이 안동공단은 1980년대 말 본격적으로 확대되면서 1990년대에는 부산, 울산, 경상남도에 조선·자동차·기계 산업의 부품과 소재를 공급하는 400여 개의 중소기업들로 활기를 띠었다.

안동공단이 조성되는 등 도심 인근에 공장이 들어서고 김해의 인구가 늘어나자 내외동과 장유동 등지에는 부족한 주택 용지를 확보하기 위한 대규모 신도시가 건설되었다. 내외동은 10년 전까지만 해도 봄이면 못자리 만들고, 가을이면 추수하면서 분주하게 땀을 훔치던 농민들의 모습으로 활기 가득했으나 1990년대 중반에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1980년대 말부터 추진된 택지 개발 사업으로 약 500만㎡에 이르던 옥토는 택지와 공장 용지로 전환되었는데, 8,700가구의 아파트를 포함하여 총 1만 2500가구가 들어서 인구도 4만 4000명에 달하였다. 장유동에는 1990년대 후반부터 신도시가 조성되면서 약 300만㎡의 농지가 잠식되었고, 조만강 인근 99만 1736㎡[약 30만 평]의 농지에는 대규모 유통 단지가 들어섰다. 분양 당시 장유동의 아파트는 남쪽으로 불모산과 금병산, 동쪽으로 김해평야낙동강이 펼쳐지는 배산임수형 단지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김해평야가 축소된 데에는 그 일부 지역의 행정 구역이 부산으로 편입된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1976년 8월 김해평야의 중심인 김해읍 대저동에 김해국제공항이 들어선 이후 1978년에는 대저읍과 명지면, 가락면 일부가 부산직할시로 편입되었고, 1989년에는 녹산면과 가락면 일부가 차례로 부산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40여 년간 토지 용도를 ‘농경지’로 제한하였던 각종 규제와 그린벨트가 차례로 해제되었고, 일대에는 거대한 신도시가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87년 낙동강 하굿둑이 축조된 이후 부산 강서구 녹산동과 신호동 일원에 녹산국가산업단지와 신호일반산업단지[부산진해경제자유구역] 등이 조성되면서 명지의 무성한 갈대밭은 매립되어 대단위 아파트 단지인 ‘명지오션시티’로 바뀌었다.

2000년대 들어서는 가덕도와 용원, 안골, 웅동만, 와성만 일대에 신항만이 개발되고, 거가대교가 건설되면서 녹산·신호공업단지 등 서부산권 개발이 더욱 활성화되었는데, 강서구 대저에는 서부산유통산업단지까지 들어서 일대 경관은 크게 변화하였다. 2010년경 김해-부산을 가로지르며 개통한 국도 제14호선 우회 도로는 김해평야를 관통하며 그 허리를 잘라 놓았고, 부산-김해경전철김해평야를 ‘S’자 형태로 누비며 농지를 잠식하였다. 광활한 옥토가 주거용 택지와 공장 용지로 바뀌면서 김해평야는 하늘로 치솟는 고층 아파트들로 채워졌고 바둑판처럼 뚫린 간선 도로에는 차량들이 넘쳐났다. 2013년부터는 김해국제공항 남쪽 명지, 강동, 대저동 일대에 ‘에코델타시티’ 건설이 진행되고 있다.

개항 이래 영남의 최대 곡창 지대였던 김해평야는 급속한 산업화와 개발 드라이브의 여파 속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다. 1970년경 동서 너비 6~12㎞, 남북 길이 약 20㎞, 전체 면적이 약 130㎢에 달했던 김해평야는 2000년대 중반에는 전체 면적이 70㎢ 남짓으로, 전체적으로 그 절반이 사라진 것으로 나타난다.

[김해평야는 기억 저편으로]

김해평야를 중심으로 농업이 번성하였던 김해 지역은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노는 계절이 없고, 노는 땅이 없고, 노는 사람이 없다”며 농민들의 자부심이 가득 찬 도시였다. 그러나 산업화, 도시화에 따른 개발의 광풍을 김해평야 역시 피하지 못했다. 가을이면 황금 물결이 일던 옥답은 공장과 아파트에 야금야금 잠식되었다. 농민들이 다른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이촌향도(離村向都)가 심화되면서 농민들은 줄곧 일손 부족을 호소하고 있다. 부모를 모셔야 하는 장남이나 기술이 없는 사람 외에는 모두가 도시로 나가버려 집집이 돌아가며 품앗이를 해 주던 일도 지금은 한갓 전설 같은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더해서 김해평야의 유일한 농업용수인 낙동강의 물은 농업용수로도 사용할 수 없을 만큼 오염되었다. 이는 안동공단에 있는 300여 개의 공장들이 배출하는 폐수와 김해의 생활 하수가 무방비 상태로 흘러들고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이 상태가 계속된다면 김해평야의 농사는 사실상 끝장날 것이라며 우려하였다. 농민들 가운데에는 김해평야에서 생산되는 쌀 대신 다른 지역의 쌀을 사서 먹는 사람도 있을 정도라고 한다.

부산광역시 서부산권의 개발, 이농 현상에 따른 인력난, 농산물 가격의 불안정, 농촌 총각의 결혼난 등 농민들을 우울하게 하는 갖가지 문제들이 산재하는 가운데 농사를 위협하는 낙동강 오염까지 더해지면서 김해평야는 점점 더 축소되고 있다. 개발 제한 구역이 해제되고 투기 바람이 일면서 김해평야는 비영농인인 외지인들이 매입하고 있으며, 이들이 농지를 무단으로 훼손하거나 다른 용도로 사용하다 적발된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쌀뿐만 아니라 명지의 대파, 녹산의 미나리, 대저의 짭짤이 토마토 등의 특산물조차도 개발 열풍에 밀려 유명무실해지고 있다.

낙동강 변의 광활한 김해평야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농사짓던 구릿빛 농민들. 부산·경상남도의 허파이자 영남 최고의 곡창 지대를 자랑하던 김해평야의 화려했던 역사가 사라지고 있다. 전 세계적인 곡물 파동과 식량 위기가 현실화되고 있는 지금, 김해평야의 상실이 우리 식량 주권의 상실로 이어지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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