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0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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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駕洛國記』, 首露王- 降臨- 許黃玉- 渡來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가야 |
집필자 | 이영식 |
[정의]
경상남도 김해 지역의 가락국 건국신화로 구성된 수로왕의 등장과 허황옥의 도래.
[가락국기 편찬과 의의]
「가락국기」는 1076년(문종 2)에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가 편찬했던 것을 1285년 경에 일연선사가 『삼국유사』에 간략하게 줄여서 실었던 것으로 가락국사의 유일한 기록이다. 편찬 시기에 대해서는 199년 수로왕릉이 축조된 이후 878년 지난 시기에 수로왕릉의 현존이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1076년의 편찬으로 추정되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금관지주사로 되어 있지만 당시 금주로 개칭되었기에 지금주사가 맞는 표현이다.
「가락국기」의 내용은 수로왕의 등장, 탈해 도전의 격퇴, 허왕후의 도래와 혼인, 수로왕의 치적, 허왕후릉의 조성과 관련 지명 전승, 수로왕릉의 조성과 제사, 수로왕의 기념 행사, 수로왕 사적에 대한 축송 등이다. 가락국 당시 뿐만 아니라, 통일 신라와 고려 시기까지의 수로왕 관련 내용이 서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나, 제2대 거등왕에서부터 제10대 말왕 구형왕까지의 역사에 대해서는 즉위, 왕비, 붕어에 대한 아주 간략한 내용만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앞서 채록된 가락국사의 유일한 기록이라는 의미는 인정되어야겠지만, 「가락국기」 편찬의 주목적이 가락국사보다는 수로왕의 건국 이래의 사적과 수로왕릉의 경영과 제사를 중심으로 수로왕에 대한 칭송과 전파에 있었음을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가락국기」는 가락국 멸망 이후 878년이나 지난 시기에 편찬된 역사서이다. 남북국 시대의 신라와 고려 시대의 유·불·선과 같은 후대적 이념에 의한 왜곡 역시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가락국기」에 건국신화로 기록된 수로왕의 탄강과 허왕후의 도래 등의 기록에 어떠한 역사가 반영되어 있는 지를 올바르게 분석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이데올로기적인 한계를 전제 또는 의식할 필요가 있다.
[수로왕의 강림]
「가락국기」는 수로왕의 탄강을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 건무(建武) 18년(42) 3월 3일에 5가야의 왕들과 함께 황금알의 모습으로 경상남도 김해시 북쪽 구지봉(龜旨峯)에 내려왔다고 기록하였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고조선 신화의 환웅과 같이, 선진 문명을 보유한 이주민 도래의 역사가 신화화된 것이며, 알의 모습이란 최초의 시조라는 위상을 나타내기 위한 건국 신화적 서술이었다. 서기 42년이라는 건국 연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수로왕의 등장을 기원했던 토착 가락구촌(駕洛九村)의 촌장인 구간(九干)이 영도하던 구간사회를 고인돌의 청동기 문화 단계로 보고, 수로왕을 도래의 목관묘 철기 문화 단계로 상정하는 일반적인 견해를 따른다면, 수로왕의 강림 신화는 기원 전후 시기 가락국 성립의 역사를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렇게 가락국 건국의 역사를 기원 전후의 시기로 상정할 때, 「가락국기」가 제시했던 서기 42년의 건국 연대가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이다.
다만 수로가 6란(卵)으로 함께 강림하였고, 처음에 나타났던 우두 머리[首]에 나타날 로(露)라 이름을 ‘수로(首露)’라 하였으며, 나머지 다섯이 5가야의 주(主), 곧 왕이 되었다 함은 이미 가락국 성립 후에 어느 정도의 시기가 지나, 인접의 5가야를 의식하게 되었던 단계를 반영한 것이었다. 가락국이 6가야의 가야 여러 나라들 중에서 중심적 위치에 있었다는 자존 의식의 발로로서, 이 시기에 형성되었던 가락국의 ‘용비어천가’가 가락국의 건국 신화로 편찬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수로왕이 강림했다는 구지봉에는 늦어도 기원전 1세기 이전에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구지봉 고인돌이 자리하고 있다. 「가락국기」의 기년대로 수로왕의 강림을 서기 42년으로 인정한다면, 뚜껑돌에 ‘구지봉석(龜支峯石)’이라는 명문이 새겨진 현존의 구지봉 고인돌은 약 150년 전부터 수로왕의 등장과 가락국의 성립을 지켜 보았던 증인이 된다.
[허황옥의 도래]
「가락국기」의 수로왕과 허왕후의 혼인담은 ‘일가의 구성’이 곧 ‘일국의 완성’을 보여준다는 건국 신화적 서술이었다. 야장(冶匠)으로 표기되어 철기 문화인으로서 이후 신라 4대왕이 되었던 탈해의 도전을 격퇴한 수로왕은 혼인 상대로서 구간들의 여식을 배척하고, 바다로부터 새롭게 도래해 온 허황옥과 혼인하였다. 수로왕 강림 이전 가락구촌의 촌장이었던 구간(九干)이라는 전통 세력을 견제하면서, 새로운 선진 문물을 가지고 도래한 허왕후 집단을 수용하여 결합되었던 역사의 반영으로 해석되고 있다. 허왕후의 출신에 대해서는 금관지주사의 「가락국기」가 아유타국(阿踰陀國)이라고만 기록했던 데 반해, 일연선사의 『삼국유사』 금관성파사석탑 조에서 아유타국 앞에 ‘서역(西域)’이 더 해지면서, 서역 곧 ‘인도공주’라는 전승이 민간에 회자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가락국기」에는 허왕후가 가져온 문물들을 한사잡물(漢肆雜物), 곧 한(漢) 계통의 여러가지의 물건들이라고 기록되었고, 김해 지역에서 가락국 왕릉 묘역으로 추정되는 양동리 고분군과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는 한(漢) 계통의 문물이 쏟아지는 데 반해, 인도 계통 문물의 적극적인 존재는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허왕후의 출신을 한(漢) 문화의 서북한 계통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일반적이지만, 현재에도 민간 전래의 ‘인도공주설’은 김해시의 홍보물이나 경전철 안내 방송에서 소개하고 있는 것처럼 만만치 않다. 아울러 사료적 신빙성에 논란이 있기는 하지만, 『화랑세기』에는 중국 요녕 지역의 용성(龍城)으로 비정되는 황룡국(黃龍國)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김해 지역 거의 모든 사찰의 창사 연기에는 허왕후와 함께 도래했다는 장유화상의 존재와 한국 최초의 불교 전파가 주장되고 있으나, 정작 「가락국기」에는 장유화상이 보이지 않으며, 『삼국유사』 금관성파사석탑 조에는 “해동에 아직 절을 세우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없었다. 대개 불교가 아직 들어오지 못하여 토착인들이 신복하지 않았으므로 본기에는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없다. 제8대 질지왕(銍知王) 2년 임진(452년)에 이르러서야 그 땅에 절을 세웠다”고 하여, 가락국 질지왕이 452년에 왕후사를 창건하기까지는 불교가 전파되지 않았다고 기록하였다. 나아가 「가락국기」는 왕후사 창건 500년 뒤인 10세기 경에 장유사가 창건될 때, 장유사의 땔나무 숲이 동남쪽 경계 안에 있다고 하여, 허왕후를 기리기 위해 창건되었다는 왕후사를 없애고 창고와 마굿간으로 삼았음을 한탄하고 있다. 정작 장유화상은 1708년의 「명월사적비문」에 처음으로 나타나고, 1797년의 은하사 「취운루중수기」에 허왕후의 오빠로 기록되었다가, 1915년의 장유사 「가락국사장유화상기적비문」에서는 남동생으로 기록되었다. 1076년의 「가락국기」에 없었던 장유화상의 전승이 1708년의 「명월사적비문」에서 처음 나타나, 1797년의 「취운루중수기」와 1915년의 「가락국사장유화상기적비문」에서 허왕후와의 남매 관계로 설정되었던 것이 확인된다.
이에 비해 「가락국기」와 『삼국유사』 왕력에는 허왕후와 함께 왔던 신보(申輔)의 딸과 조광(趙匡)의 손녀가 제2대 거등왕과 제3대 마품왕의 왕비가 되어, 모두 3대에 걸친 가락국 왕비족의 존재가 기록되었으며, 『삼국유사』 금관성파사석탑조에서는 허왕후가 150여 년 동안 수로왕과 함께 가락국을 다스렸다고 하였다. 허왕후는 ‘수로왕비’이면서 수로왕의 왕족에 대한 왕비족의 수장이었다. 허왕후릉이 수로왕릉에서 북쪽으로 약 1㎞나 떨어져 있는 점과 연결해 가락국 초기 왕비족인 허왕후 집단의 독립적 성격이 지적되고 있다.
[가락국의 발전]
탈해의 도전을 물리치고, 허왕후와의 혼인을 통해 건국을 완성했던 수로왕은 관제의 정비와 선정를 통해 가락국의 발전을 이룩하였다. “구간(九干)의 칭호가 비루하여 외국의 비웃음을 살 것이다” 라 하여, 아도(我刀)를 아궁(我躬), 여도(汝刀)를 여해(汝諧), 피도(彼刀)를 피장(彼藏), 오방(五方)을 오상(五常), 유수(留水)와 유천(留天)을 유공(留功)과 유덕(留德), 신천(神天)을 신도(神道), 오천(五天)을 오능(五能), 신귀(神鬼)를 신귀(臣貴)로 각각 고치고, 계림(鷄林) 신라의 직제를 따라 각간(角干), 아질간(阿叱干), 급간(級干)의 등급을 두었으며, 그 아래에는 주(周)나라의 법과 한(漢)나라의 제도를 차용하여 옛것을 새것으로 고쳤다고 한다.
신라의 직제를 차용했다는 것은 신라의 병합 후에 부쳐진 전승으로 추정되나, 중국의 법과 제도의 차용은 가락국의 발전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나아가 “나라가 다스려지고, 백성들이 교화되어, 중국의 이상적인 요순 시대와 같았다”는 표현은 다소 작문적이기는 하지만, 건국 초기 단계에서 발전 단계로의 전개를 반영하는 기록이다.
이러한 가락국의 발전은 『삼국지』 한전이 나누어 기록한 ‘소국’에서 ‘대국’으로의 발전에 해당하고, 김해 시내 중심지에서 발굴 조사된 1세기 경의 가야의 숲 3호 목관묘를 ‘소국’ 단계로, 3세기 중후반 경의 대성동 29호분을 ‘대국’ 단계로 각각 대입 상정하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1세기 경의 가야의 숲 3호 목관묘는 김해 대성동 고분군이 조성되기 시작되는 능선 평지에 묘광 길이 260㎝, 너비 140㎝, 깊이 82㎝에 [통나무]목관 길이 170㎝, 너비 75㎝, 잔존 높이 38㎝로, 칠기 부채 2점, 칠초 철검 1점, 청동거울 1점, 다수의 칠기 편, 주머니호 2점, 양이부호 1점, 조합식우각형파수부호 2점, 청동창 1점, 쇠고리 1점, 단조철부 2점, 따비 1점, 철창 3점, 원통형칠기 2점이 출토되었다.
이에 비해 3세기 중후반 경의 대성동29호 목곽묘는 ‘애기구지봉’ 불리는 김해 대성동 고분군 중턱에 묘광 길이 960㎝, 너비 560㎝, 깊이 130~35㎝에 추정 복원 목곽 길이 약 640㎝, 너비 약 320㎝에 6×8열로 나열된 단경호, 중앙부에 동복(銅鍑), 좌우 측면에 줄지워 세운 화로형 토기와 단경호, 바닥에 깔았던 판상 철부 91점, 대도 3점, 다량의 철촉과 철부, 금동관 편 등이 출토되었다. 이전 단계와 다르게 대성동 29호분에서는 대형의 무덤 규모와 다량의 고급 유물의 부장이 확인되고, 전혀 새로운 도질 토기가 새롭게 출현하였고, 왕자(王者)의 표식인 금동관(金銅冠)이 출토되었다는 것은 ‘대국’의 고대 왕국으로 발전하였음을 보여주는 물적 증거이다.
[가락국 가야문화의 계승]
「가락국기」는 수로왕과 허왕후의 붕어와 능묘의 조성을 언급하고, 제2대 거등왕부터 제10대 마지막 왕인 구형왕에 이르기까지 330년 동안 정기적인 제사가 이어졌음을 기록하였다. 이후 661년에 신라 문무왕이 가락국의 외손임을 천명하면서, 수로왕릉의 정비와 제사의 계승을 명령하였고, 199년에 수로왕릉이 조성된 이후에 1076년에 「가락국기」가 편찬될 때까지 대개 878년 간의 수로왕릉의 배향에 관련된 몇 가지 사연들과 함께 수로왕릉의 현상과 신성성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가락국기」는 고려 시대에 수로왕을 사모하는 배젓기 경주(競舟)의 축제와 허왕후의 도래에 관련된 망산도(望山島), 고포(古浦), 주포(主浦), 능현(綾峴), 기출변(旗出邊) 등의 지명 전승과 함께, 681년 금관경(金官京), 940년 임해군(臨海郡), 988년 김해부(金海府) 등을 기록하였는데. 이러한 전승과 지명들은 조선 전기의 『신증동국여지승람』과 1630~1928년에 편찬 증보되었던 『김해읍지』를 거쳐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다.
현재 경상남도 김해시와 장유동의 명칭도 「가락국기」에서 비롯되었된 것이었다. 다만 장유는 가락국 제8대 질지왕이 452년에 허왕후를 기리기 위해 창건했다는 왕후사를 500년 뒤에 없애고 장유사(長遊寺)의 창고와 마굿간으로 하였다는 기록에서 비롯된 것이다. 장유화상이라는 이름이 1708년의 「명월사적비문」과 1797년의 은하사 「취운루중수기」에 허왕후와 남매 관계로 등장한 이래, 김해 지역의 민간 전승으로 뿌리 깊게 자리하게 된 것과는 괴리가 있다. 전통적으로 수로왕릉과 허왕후릉에는 능참봉이 임명되었고, 현재까지도 수로왕의 탄강을 기념하는 춘향대제(春享大祭)가 매년 음력 3월 3일에 거행되고 있다. 김해 시민들은 춘향대제를 계기로 하여, 1962년부터의 가락문화제를 시작으로, 현재까지 가야문화축전으로 기념하면서 시민들의 축제로 2천년 전부터의 가락국 가야 문화를 계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