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010
한자 壬辰倭亂- 金海城 戰鬪
영어공식명칭 Japanese Invasion of Korea in 1592~1598 and Battle of Kim Hae-Castle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강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92년 4월 19일 - 일본군 서낙동강 상륙, 김해읍성 포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592년 4월 20일 - 일본군 김해읍성 함락

[정의]

1592년 4월 임진왜란 초기 경상남도 김해성에서 벌어진 조선군과 일본군의 전투.

[개설]

임진왜란은 일본의 도발로 일어나 1592~1598년 7년간 지속된 전쟁이다. 일본군은 1592년 4월 14일 부산진성을 점령한 이후 차례로 조선으로 침입해 들어왔다. 임진왜란 개전기에 김해 지역은 일본군 제3군의 침입로와 침략 거점으로 이용되었다. 강화 회담기에 일본군은 김해 지역에 죽도왜성 등을 쌓아 식민 지배를 하면서 지역민을 수탈하였다. 정유재란기에도 김해 지역은 부산 다대포에 상륙한 일본군의 침략을 일찍 받았으며, 왜성에 일본군이 주둔하자 많은 피해를 계속 입은 대표적인 지역이다. 임진왜란 초기에 김해 지역에서는 김해성을 둘러싸고 4월 19~20일에 걸쳐 격렬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비록 수적인 열세로 함락되었지만, 김해부사 서예원이 도망친 후에도 김해 지역의 군·관·민은 끝까지 항쟁하다 전사했다.

[임진왜란의 역사적 배경]

조선, 명, 일본 세 나라는 14세기 후반에 각각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면서 안정되었지만, 16세기에 이르러 명의 쇠퇴, 여진족의 발흥, 일본의 통일로 국제 관계가 급속하게 변화하였다. 이때 조선은 남북의 일본과 여진족으로부터 차례로 침략당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16세기 말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오랫동안 지속되던 국내 분열의 혼란을 수습하고 통일하였다. 아직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 못했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오랜 기간의 전투에서 얻은 다이묘[大名]들의 무력을 해외로 돌려서 국내의 통일과 안정을 유지하고, 신흥 세력의 등장을 억제하기 위해서 대륙 침략의 망상을 갖게 되었다. 아울러 일본은 여러 차례의 왜변(倭變)으로 단절되었던 조선과 명나라와의 교역 문제점을 외교적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군사력으로 타개하기 위해 침략의 야욕을 드러냈다.

반면 조선은 건국 이후의 안정 속에서 국방을 소홀히 하였으므로 군사 방어 체제와 군사 동원에서 많은 문제점이 드러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군정(軍政)이 문란해져서 필요한 군사 수를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다. 이에 지방의 방어 체제인 진관제(鎭管制)를 제승방략(制勝方略) 체제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조선의 지배층은 일본이 통신사(通信使) 파견을 요청하면서 노골적으로 침략 야욕을 드러냈지만, 제대로 된 대책을 세우지 못하였다. 한편 일본의 침략 계획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는데, 오랜 전투를 통해서 길러진 군사력을 정비하고, 조선 침략을 위한 군사와 군량 등을 전국에서 대대적으로 징발하였다. 특히 서양에서 전래된 신무기인 조총(鳥銃)을 포르투갈 상인으로부터 구입한 후 대량 생산하고 선박을 구입하면서 전쟁 준비에 진력하였다.

[임진왜란 발발과 김해성 전투]

임진왜란 7년 전쟁은 임진왜란 개전기, 강화 회담기, 정유재란기로 전개되었다. 1592년(선조 25) 4월 13일 일본군은 17만여 명의 대군을 9번대(番隊)로 나누어 침략을 시작하였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끈 제1군은 부산 앞바다에 도착하여 부산포를 침략하고, 4월 14일 부산진성을 함락하였다. 일본군은 이어서 동래부를 4월 15일에 점령하였다. 이후에 순차적으로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3로로 나누어 북쪽으로 침략하였다. 일본 제1군이 양산에서 밀양으로 진격할 무렵인 19일에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지휘하는 제3군 11,700명이 김해 서낙동강에 상륙하였다. 일본 제3군은 김해-함안-창녕-김천을 거쳐 추풍령을 넘어 청주-죽산-용인에 이르는 서로(西路)를 택하여 한성을 목표로 북상하였다. 부산에서 기장으로 진출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제2군은 19일 언양을 점령하였으며, 이어서 경상좌병영이 있는 울산 지역을 점령하고, 21일 경주로 북상하였다. 이렇게 조선의 관군이 쉽게 무너지자 일본군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5월 2일 한성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6월 이후 조선 8도 전역에서 의병과 의승군(義僧軍)이 봉기하여 일본군을 직접 타격하고, 이순신(李舜臣)이 이끈 수군의 활약으로 조선은 전세를 만회할 수 있었다.

임진왜란 개전기에 김해성에서는 김해부사 서예원(徐禮元)과 초계군수 이유검(李惟儉)이 성을 지키고 있었다. 일본의 제3군은 부산 앞바다에서 해상으로 기동하여 녹산포를 거쳐 죽도 인근의 불암창에 상륙하였다. 서예원은 이곳에 초선(哨船)을 미리 띄워 놓고 적정을 탐색하고 있었으므로, 일본군은 먼저 배를 빼앗은 후 조총을 쏘면서 육상으로 공격하여 올라왔다. 이곳을 지키던 감시병들은 싸우다 물러나 김해성 안으로 들어갔다. 당시 김해성의 조선군은 주장 부사 서예원(徐禮元), 중위장(中衛將) 초계군수 이유검(李惟儉)이 거느린 군사들과 지역의 의병이 중심이었다. 반면에 일본군은 제3군 주장 구로다 나가마사, 요장(僚將) 오토모 요시무네[大友吉統], 요장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로 전체 병력은 약 11,700명이었다. 김해성 전투 무렵 영산에 머물면서 군사를 지원해 줄 수 있었던 경상감사 김수(金睟)는 각 읍에 격문을 보내어 백성들을 피난시키고, 자신은 낙동강을 건너 경상우도의 내륙으로 도주하였다. 이에 창녕현감 이철용(李哲容), 현풍현감 유덕신(柳德新) 등도 피난한다고 하고 산 속으로 숨어버렸다. 또 김해를 군사적으로 관할하던 경상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은 창원의 마산포에 진을 치고 있었지만, 김해성을 구원하지 못하고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김해성을 점령한 나가마사 군이 창원 방면으로 진격해 오자 진을 버리고 달아났다. 다만 의령현감 오응창(吳應昌)은 김해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병력 100명을 배에 싣고 남강을 건너다가 배가 침몰하여 행방불명이 되었다.

죽도에 상륙한 일본군의 제3군은 김해성으로 이동하여 이중으로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부사 서예원은 비상경계 태세를 갖춘 다음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기로 하였다. 전투가 발발하자 서예원은 처음에 남문을 지키고 있었지만, 이후에는 위치를 고정하지 않고 성 안의 각처를 순시하면서 종일토록 전투를 독려하였다. 이유검은 서문을 지키면서 직접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당시 김해읍성의 성벽은 높고 호지(濠池)가 깊어서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일본군은 성의 공격이 쉽지 않음을 알고 성 주변의 보리밭에서 보리 이삭을 모았으며, 민가에 있는 볏짚을 날라와서 야밤에 몰래 성호(城壕)를 메우기 시작하였다.

이때 동문 사관(射官) 백응량(白應良)은 대궁(大弓)으로 성 위의 소나무 그늘에서 화살을 쏘아 일본군 부장을 말 위에서 떨어뜨리고, 삼시삼중(三矢三中)으로 일본군의 사졸을 쏘아 넘어뜨렸다. 그러나 준비된 화살이 적었으며, 또 외부의 지원이 없는데다가 주장(主將) 서예원의 전의도 굳지 못하여 해가 지자 군사들의 사기는 떨어졌다. 더욱이 밤에 초계군수 이유검이 야경(夜警)이라고 거짓 칭하고 먼저 성문 밖으로 도망쳤다. 뒤늦게 이 사실을 들은 부사 서예원도 이유검을 잡으러 간다는 핑계로 거짓말을 꾸며대고, 서문으로부터 도망하여 강창(江倉)에서 배를 타고 진주 쪽으로 달아났다. 병사들은 수장이 없어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면서 있는 화살을 모두 쏘아버린 다음, 서·남·북문으로부터 한두 명씩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반면에 일본군은 볏짚과 보리 이삭을 쌓아 놓은 동문쪽 성벽을 넘어 성 안으로 돌진하여 들어왔다. 이렇게 수령이 없는 김해성은 4월 20일 새벽에 함락되었다.

당시 김해성 전투의 상황은 고성현 동면에 살았던 사노(私奴) 충걸(忠乞)의 사례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다. 충걸은 3월에 김해 북문 밖에 사는 숙부 춘복(春福)을 찾아보고 돌아가다가 김해부 석전군(石戰軍)에 뽑혔다. 충걸은 4월 19일 일본군이 김해성을 공격할 때 동문의 사관 백응량 밑에서 활약하였다. 마침내 성이 함락되자, 이름 모르는 화포장(火砲匠)과 같이 동문에 숨어 있다가, 일본군이 성 안의 사람을 죽이는 틈을 타서 도망하여 서문 밖 수로왕릉 밑에 숨어 있었다. 밤에 북쪽으로 30리를 달려서 소질산 골짜기에서 춘복을 만났다. 여기서 밥을 지어 먹고 지내는데, 일본군이 와서 일행 중 7명을 죽였다고 하였다.

김해성 전투에는 김해 지역의 의병이 참전하여 끝까지 싸웠다. 1592년 4월 14일 부산진성이 함락되고 15일 동래가 적의 수중에 넘어가자, 송빈(宋賓)은 고을 친구 이대형(李大亨)·김득기(金得器)·류식(柳湜) 등과 함께 장정 수백 명을 모아서 김해성으로 들어가서 서예원을 도와 중군(中軍)을 맡았다. 이때 이대형(李大亨)·김득기(金得器)·류식(柳湜)도 각각 성문을 나누어 지켰으며, 이인지(李獜祉)는 군량 조달을 맡았다. 부사 서예원 등이 도망한 후에 분격한 송빈은 의병으로 영남의 곡창이며 요충인 김해성을 사수할 것을 맹세하였다. 송빈은 이끌고 온 장정들을 독려하여 혈전(血戰)을 계속하였다. 그러자 19일 밤에 일본군은 허수아비를 무수히 만들어 성 안으로 던져서 군사들을 교란시키며 쳐들어오려 하였다. 또 일본군은 호계천[동상동부원동을 흐르는 시내] 상류를 막아 성 안의 물을 끊었다. 이에 성 안의 사람들은 갈증으로 고통을 겪었으며, 항복하자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성 안에 남은 군사들은 성 문을 굳게 닫아걸고 죽기 살기로 계속 싸웠다. 마침내 성 안에서는 동문 쪽으로 진입한 일본군과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졌다. 송빈·이대형·김득기·류식은 투항을 권고하는 일본군을 꾸짖으며, 남은 군사와 백성을 이끌고 싸우다 순절하였다. 이렇게 김해성은 일본군의 수중으로 넘어갔고, 일본군은 김해를 거점으로 삼아 활동하다 경상우도 창원으로 나아갔다.

한편 일본군은 명나라가 참전하자 전세의 불리함을 알고 강회 회담을 진행하면서 남쪽으로 후퇴하였다. 다만 1593년 6월 진주성을 총공격하여 함락시킨 후 남해안에 쌓은 왜성(倭城)으로 들어가 주둔하였다. 1593년 5월 이후 김해에는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군이 죽도왜성과 지성(支城) 신답왜성을 쌓아 주둔하였다. 이에 김해 지역에는 일본군이 계속 주둔하면서 식민 지배를 통해 지역민을 약탈하였다. 당시 일본군 치하에서 생활하는 조선인도 있었으며, 부역자도 있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일본에 잡혀갔는데, 도공(陶工)은 일본에서 도자기를 만들어냈다. 이런 상황에서 국왕 선조(宣祖)는 국문으로 된 유서(諭書)를 내려 조선 백성을 돌아오도록 회유하였는데, 김해부사 권탁(權卓)이 임무를 수행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후퇴하여 울산 서생포에서 거제에 이르는 남해안에 왜성을 쌓고 머무르면서 강화 회담을 진행하였다. 강화 회담에서 제외된 조선은 사명당(四溟堂)을 1594년 4월부터 4차례 서생포왜성에 파견하여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회담을 통해서 일본의 사정을 파악하였다. 이처럼 강화 회담기에도 김해 지역은 일본군의 주둔 거점이자 식량 보급처였기 때문에 어느 지역보다 일본군의 약탈을 많이 당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강화 회담의 조건이 맞지 않아 회담은 결렬되었고, 1597년[정유년] 1월 일본군이 다시 쳐들어왔는데, 이를 ‘정유재란’이라고 부른다. 가토 기요마사의 제1군은 부산 다대포에 상륙하여 양산을 거쳐 서생포에 결집하였다. 정유재란 때 14만여 명의 일본군은 좌군과 우군으로 나누어 곡창 지대 전라도를 공격하였다. 우군에 속한 가토 기요마사도 경상우도로 거쳐 전라도를 공격하여 점령하였지만, 일본군은 충청도 직산전투에서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에 패배하였다. 이에 일본군은 경상도로 다시 남하하였는데, 나베시마 나오시게 군은 10월 죽도왜성으로 들어가 주둔하였으며, 지성인 마사왜성과 신답왜성에도 주둔하였다. 이후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사로병진책(四路竝進策)으로 총공세를 전개하였는데, 사천의 선진리성과 울산의 도산성 등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다시 일본군의 전세가 불리해지고,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을 계기로 일본군이 순차적으로 철수하면서 7년간의 전쟁은 끝이 났다. 정유재란 때 김해는 일본군이 최후까지 주둔하는 거점이자 약탈을 당한 지역이었다.

[임진왜란 시기 김해 지역의 피해상과 사충신]

임진왜란은 조선·일본·명의 동아시아 3국에 많은 인적, 물적 피해를 남겼다. 김해 지역에서는 특히 김해성을 지키기 위해 싸운 전투에서 많은 인원이 희생되었다. 김해 지역은 임진왜란 초기에 일본군의 주요한 진격로였으며, 전쟁 동안 계속 일본군의 주요 교두보로 활용되었다. 때문에 김해 지역민들은 전쟁 중에 일본군에게 많은 부담과 희생을 강요당했으며, 많은 인원이 포로로 일본으로 끌려나갔다. 임진왜란 중에 일본군은 김해 지역에 죽도왜성, 마사왜성, 신답왜성을 축조하였는데, 지금까지 임진왜란의 흔적을 간직한 채 남아 있다. 7년 전쟁을 거치면서 전국적인 현상이었지만 김해 지역의 농경지는 심각한 피해를 입어서 토지 결수가 축소되었으며, 인구 감소로 노동 인구가 줄어들어 문제가 되었다.

한편 김해는 임진왜란 초기부터 김득기, 류식, 송빈, 이대형 사충신이 중심이 되어 자발적으로 적극적인 의병 항쟁을 전개한 지역이었다. 때문에 전쟁에서 활약했던 인물들은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이름을 올렸으며, 임진왜란 때 창의한 의병 사충신을 기리는 사충단(四忠壇)송담서원(宋潭書院) 등이 건립되었다. 또 의병장의 공적을 기리는 실기(實記)와 유사(遺事) 등이 기록물로 만들어져 전해오면서 의병의 활동과 전투 상황을 알려 주고 있다.

[김해성 전투의 의의와 임진왜란으로 인한 변화]

전쟁사적인 측면에서 임진왜란 초기의 김해성 전투는 관군과 의병 및 군민이 일본 대군에 맞서 싸운 격렬한 항쟁이었다. 김해성의 조선군은 일본군에 비해 군사수나 무기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았지만, 일본군과 대결하여 이틀 동안을 버텼다. 비록 김해성은 함락되었지만 전투에서 싸운 의병은 이후 7년간에 걸친 전쟁에서 일어난 의병 활동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한편 일본 제3군 구로다 나가마사가 김해성을 점령한 이후 일본군은 창원성을 공략하고, 낙동강을 건너 영산·창녕·현풍의 낙동강 좌측을 장악하면서 북상하였으며, 다시 경상우도로 침입하여 4월 27일 성주를 함락시켰다. 이렇게 김해는 일본군의 후방 거점이 되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은 조선에 큰 영향을 주어 사회 변화의 계기가 되었다. 김해 지역에서는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침략과 전투 과정에서 많은 희생자를 냈으며, 도공(陶工) 등이 포로로 일본에 끌려갔다. 이들은 일본 도자기 산업의 주역이 되었다. 한편 군공(軍功)이나 납속(納粟) 등으로 신분 상승이 일어나면서 신분 제도에 나타난 변화가 김해 지역에서도 나타나기도 했다. 속오군(束伍軍)이 전쟁 중에 편성되어 지방군의 주력이 되면서 하층민도 군인이 되었다. 전쟁 이후 김해 지역에서도 서원(書院), 사우(祠宇), 정려(旌閭)가 건립되었다. 이런 노력을 통해서 김해 지역에서 사족 지배 질서가 유지되었으며, 하층민의 성장을 반영한 동약(洞約)을 실시하면서 향촌 사회의 안정을 이루어나갔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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