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시대 금주, 지역 거점 도시로 성장하다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009
한자 高麗 時代 金州, 地域 據点 都市- 成長-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고려/고려 전기
집필자 김광철

[정의]

고려 시대 지역 거점 도시로 성장한 경상남도 김해 지역의 사회 구조와 문화, 그리고 사회 변화.

[나말여초 사회변동, 김해의 선택]

신라 말 농민 항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각 지역에서는 ‘성주(城主)’, ‘장군(將軍)’이라 불리는 지방 호족세력이 등장하고 있었다. 호족은 본래 ‘호부층(豪富層)’으로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다가, 농민 항쟁 세력을 끌어들여 군사적 기반을 갖추고 지역을 지배하는 지방 세력이 되었다. 이들은 당대등(堂大等)·대등(大等)으로서 그 관할 하에 호부·창부·병부로 구성된 독자적 행정 조직인 관반 체제를 갖춰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신라 통일기 ‘소경(小京)’으로서 위상을 지녔던 김해 지역 사회에도 사회 변동의 큰 물결이 밀어닥쳤다. 그것은 당시 김해 지역에 유력한 호족이 등장하여 지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데에서 엿볼 수 있다. 소충자(蘇忠子)·소율희(蘇律熙) 형제와 김인광(金仁匡) 등은 김해 지역 호족으로서 ‘지김해부진례성제군사(知金海府進禮城諸軍事)’의 지위를 가지고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은 창원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대표적 선종 사원인 봉림산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김해-창원 일대에 세력을 형성하였다.

김인광은 소경의 관리이거나 가야 왕족으로 이해된다는 점에서, 낙향 귀족 출신이거나 그와 유사한 사회적 지위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반면 소충자·소율희 형제는 당나라와의 교역 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하여 호부층이 되었고, 그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군사력을 확보하여 김해 지역의 호족으로 성장하였다. 이들 김해 지역 호족들 사이에는 협조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지배 영역의 확장을 위해 갈등 관계를 보이면서 정복 전쟁을 벌였을 가능성이 높다. 『가락국기(駕洛國記)』에서 묘사된 것처럼, 잡간(迊干)인 충지(忠至)와 가야 왕족 간에 제사권을 둘러싼 다툼은 소충자·소율희 형제가 김인광이 지배하는 영역까지 진출하는 과정과 그에 따른 갈등 관계를 보여준 것이다.

신라 말 사회 변동기에 김해 지역의 읍격은 ‘김해소경’이 아니라 ‘김해부’였다는 사실도 주목된다. 신라 중앙 정부는 김해 지역에서 지방 세력이 등장하자, 김해소경을 김해부로 개편하여 지역 호족이 실질적으로 지역을 관할하게 하면서 한편으로는 지역을 통제하는 데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금주, 거점도시로 우뚝 서다]

1018년(현종 9) 김해 지역 사회는 경상도 거점 도시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 해에 고려 중앙 정부는 전국적으로 지방 제도의 개편을 단행하면서 이미 1012년(현종 3) ‘금주(金州)’로 승격된 김해 지역에 몇 개의 속읍을 편입시켜 그 위상을 한층 높여주었다. 금주 관할의 속읍으로는 『고려사』 지리지에서 속군으로 함안군(咸安郡)과 의안군(義安郡) 두 곳, 속현으로 웅신현(熊神縣), 칠원현(漆原縣), 합포현(合浦縣) 세 곳이라고 했으나, 여기에 완포현(莞浦縣)과 구산현(龜山縣)까지 합하면 모두 7개의 속읍이 있었다.

김해 지역이 거점 도시 주읍으로 승격될 당시 경상도는 10도제 하에서 상주를 관할하는 영남도(嶺南道), 경주와 금주를 관할하는 영동도(嶺東道), 진주를 관할하는 산남도(山南道)로 나누어져 있었다. 현종 9년의 군현 개편에 따라 뒷날 경상도 지역이 되는 이들 3개 도(道)의 군현 수는 모두 128개 고을이었는데, 이 가운데 지방관이 파견되는 주읍은 14개 고을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 114개 고을은 속읍으로서 이들 주읍 14개 고을에 편입되어 통제를 받고 있었다. 주읍이라고 하더라도 고성현은 속읍이 없었고, 울주와 양주, 남해현은 2개, 거제현은 3개의 속읍을 갖는 데 그치고 있어, 거점 도시로서 기능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므로 경상도 14개 주읍 가운데 거점 도시로서 위상을 지닌 군현은 금주를 비롯해서 경주, 밀성군, 상주목, 안동부, 경산부, 예주, 진주목, 합주 등 9개 고을에 지나지 않았다.

고려 시대 김해 지역이 경상도 연해의 거점 도시로 성장하기까지 그 읍격에는 몇 차례 변화가 있었다. 후삼국을 통합한 후 고려 정부는 941년(태조 23) 경 군현 개편을 단행하면서 김해 지역을 임해현(臨海縣)으로 개편하였고, 곧이어 임해군으로 개칭하였다. 신라 통일기에 ‘김해소경’이었고, 신라 말 호족 지배 하에서도 ‘김해부’로서 위상을 유지했던 것을 감안하면, ‘임해현’으로 개편한 것은 읍격을 강등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까닭은 후삼국 시기 김해 지역이 후백제 관할 하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통일 후 고려 정부가 지역 통제 방식의 하나로 취한 조치였다.

임해현으로 강등되었던 김해 지역은 971년(광종 22)에 다시 ‘김해부’로 개편됨으로써 고을의 위상을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995년(성종 14) 10도제 체제로 지방 제도를 개편하면서 김해 지역은 금주안동도호부(金州安東都護府)가 되어 그 위상을 강화하였고, 1012년(현종 3) 금주방어사로 잠시 강등되는 듯 하다가, 그로부터 6년 뒤 현종 9년의 전국적 군현 개편에서 7개의 고을을 속읍으로 편입한 거점 도시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한편, 거점 도시로 성장한 금주는 동남해 해양 방위와 대외 관계를 담당하는 수군 기지로도 기능하였다. 1078년(문종 32)에 금주를 동남해도부서사(東南海都部署使)의 본영으로 삼은 것이 그것이다. 김해 지역에 설치된 동남해도부서사 본영은 이후 몇차례 ‘설치’와 ‘혁파’를 반복하였다. 1078년 설치되어 112년 간 유지되다가 1190년(명종 20)에 혁파되고, 그로부터 12년 뒤 1202년(신종 5) 다시 복구되었으며, 1293년(충렬왕 19) 다시 혁파되었다가 1368년(공민왕 17)에 원래대로 설치되지만, 그로부터 10년 뒤 1378년(우왕 4) 마지막으로 혁파되었다.

[김해 지역사회의 구조]

고려 시대 지방 제도로서 군현 체제는 크게 일반 군현 영역과 특수 행정 구역인 부곡 영역으로 구성되고, 군현 영역은 다시 주읍과 속읍으로 편제되었다. 주읍이었던 김해 지역에도 일반 군현 영역과 함께 부곡 영역으로서 네 곳의 향과 두 곳의 부곡이 있었다. 제을미향(齊乙彌鄕), 성화례향(省火禮鄕), 달음포향(達音浦鄕), 감물야향(甘勿也鄕), 수다부곡(水多部曲), 태산부곡(太山部曲) 등이 그것이다. 소(所)는 전하지 않고 있지만, 감물야향이 야철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아 소일 가능성이 있다.

김해 지역 부곡제 영역의 위치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거리를 기준으로 하면, 제을미향은 관아 남쪽 20리, 성화례향은 남쪽 40리, 달음포향은 동쪽으로 25리, 감물야향은 동쪽 20리, 수다부곡은 동쪽 15리, 태산부곡은 서북쪽 45리 지점이다. 모두 김해 중심지에서 사방으로 최소 15리 밖 주변에 위치하고 있었다.

고려 시대 김해의 하부 행정 편제인 촌의 존재가 어떠한지, 이를 알려주는 직접적인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고려 시대에 편찬된 『가락국기』에서는 구지봉(龜旨峰), 도두촌(渡頭村), 주포촌(主浦村), 능현(綾峴), 기출변(旗出邊), 고포(古浦) 등이 지명을 확인할 수 있지만, 이들이 하부 행정 단위로 작동했는지 알 수 없다.

조선 전기 지리서인 『경상도속찬지리지』[1469]에서 확인되는 몇 개의 리(里)나 촌 등은 고려 시대 김해의 행정 구획으로도 기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제언조에서는 부 동쪽의 활천리(活川里), 부 서쪽 거인리(居仁里), 성중리(城中里), 감천리(甘川里), 주촌(酒村), 부량곡(釜良谷), 부 북쪽 삼산리(三山里), 유등(柳等), 삼백천(三百川), 오근암(杇近岩) 등의 지명이 보이고, 목장조에서는 부 남쪽 명지도(鳴旨島), 사묘(祠廟)조에서는 읍성 서쪽 대기음리(大岐音里), 부 북쪽 삼산리, 부내 남산리(南山里), 부 서쪽 진례촌(進禮村) 등을 찾을 수 있다.

도기소와 자기소조에서는 부 동쪽의 여차저(余次渚)와 감물야(甘勿也)가 보이고, 원우(院宇)조에서는 좀 더 많은 수의 촌과 리를 찾을 수 있다. 남정원 소재지로서 부 동쪽 청석리(靑石里), 이수개원[동쪽 15리]의 소재지로 활천리, 황산원 소재지로 감물야촌, 흥복원[서쪽 7리] 소재지로 성중리, 냉천원[서쪽 30리] 소재지로 부량곡리, 노현원 소재지로 고법야촌(古法也村), 초령원[남쪽 30리] 소재지로 석계지(石階地), 북정자원[북쪽 7리] 소재지로 삼산리, 삼기이원[북쪽 10리] 소재지로 북곡리(北谷里), 해양원[뇌진 언덕]의 소재지로 성을저(省乙渚) 등이 그것이다.

주로 ‘리’나 ‘촌’으로 표기된 이들 지명들은 이미 고려 시대 어느 시기부터 김해 지역의 하부 행정 단위로 편제되어 있었다. 감물야촌의 경우 고려 전기까지는 감물야향으로서 기능하다가 고려 후기에 들어와 향·소·부곡 등 부곡제 영역이 해체되기 시작하면서 김해의 직촌으로 편제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이후 김해 지역에 면리제가 시행되면서, 이들 지역은 면으로 편제된 곳도 있고, 또는 면 소속의 리가 된 곳도 있었다. 『호구총수』[1789] 김해의 면리 조직을 보면, 활천리, 주촌, 진례촌, 명지도 등은 면이 되었고, 청석리는 활천면 소속의 리, 북곡리와 삼산리는 우부면 소속의 리, 삼백천리는 주촌면 소속의 리가 되었으며, 감물야촌은 대감물야리와 소감물야리로 나누어져 상동면의 소속 리가 되고 있다.

고려 시대 김해에는 지방관으로 수령인 방어사, 방어부사와 함께, 판관(判官), 사록(司錄), 장서기(掌書記) 등이 파견되어 있었다. 판관과 사록, 장서기는 이른바 속관(屬官)으로서 수령을 보좌하는 한편 행정 업무를 담당하였다. 그 아래에 지방관을 도와 행정 실무를 처리하는 향리층이 있었다. 금주의 향리는 김·허·배·손·송·유씨 등 토성층이었다. 금주의 향리수가 얼마였는지 알 수 없지만, 인구 수를 300정 이상으로 추정하면 51명 정도의 향리가 활동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김해의 지방관과 향리층은 치소(治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치소에는 치소성이 축조되었고, 행정 관청인 관아, 객사가 기본적으로 배치되었으며, 향리의 자치 조직인 읍사(邑司)가 자리 잡고 있었다. 치소는 인구가 집중되어 있는 곳이었고 도로와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교통의 중심, 대외교섭의 창구]

고려 시대 김해 지역 사회에는 여러 방면의 역로망이 구축되어 있었다. 고려 시대 역로는 22개의 역도(驛道)에 525개의 개별 역이 분포되어 있었는데, 김해 지역에 해당하는 금주도(金州道)에는 31개 역이 소속되어 있었다. 금주도는 김해를 중심으로 칠원, 의안, 함안, 합포, 밀성, 창녕, 청도, 현풍, 계성, 동래, 영산, 울주, 양산, 언양 지역의 역들로 연결되어 있었다. 역도 별 평균 24개 역이 소속되어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김해는 훨씬 많은 역을 관장했던 셈이다. 김해 지역에 설치된 역만 하여도 덕산(德山)·성잉(省仍)·적항(赤項)·금곡(金谷)·대역(大驛) 등 5개 역이 있었다. 고려 시대 김해는 내륙과 연해 지역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출발지이자 중심지였다.

김해는 육로 교통의 중심지일 뿐 아니라 해안 방어와 대외 통교의 요새지였다. 일본과의 교섭을 담당하던 창구이고, 왜구의 침입을 막고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을 위한 전진 기지였다. 기록 상 일본과 김해의 첫 접촉은 1049년(문종 3) 11월 대마도에서 수령 명임(明任) 등을 보내 고려의 표류민 김효(金孝) 등 20명을 김해로 인계한 사실이며, 공식 사신으로는 1056년(문종 10)에 등원조신뇌충(藤原朝臣賴忠) 등 30명이 김해에 건너 온 일이다.

1202년(희종 2) 일본 사신 개명뢰(介明賴) 등 40명이 진봉선(進奉船) 3척을 김해 남쪽 포구에 정박시키고 교역을 시도한 사실이 확인되며, 1243년(고종 30) 1월 일본이 고려에 방물(方物)을 바치고 표류민을 귀환시킬 때에도 김해가 그 창구 역할을 담당하였다. 여몽전쟁 후 원나라의 간섭을 받으면서부터는 김해가 일본으로 파견되는 원나라 사신이 머무는 곳으로 활용되었다. 1271년(원종 12) 9월 원나라에서 파견한 일본국신사(日本國信使) 조양필(趙良弼)이 김해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그 예이다.

고려 시대 김해 지역이 대외 교섭, 특히 대일 교류의 창구 역할을 담당했다는 것은 이 곳에 두었던 동남해도부서 본영의 존재에서 확인할 수 있다. 동남해도부서 본영은 본래 939년(태조 22) 경주에 설치했던 것인데, 1079년(문종 32) 일본과의 교섭을 위한 교통상의 문제를 감안해 금주로 이동시켰다. 당시 금주가 차지하고 있는 대일 관계 상의 지위를 고려한 조치였다. 김해의 동남해도부서 본영은 남쪽 40리 지점에 위치한 명월산 아래 구량촌(仇良村)에 수참(水站)을 설치하고 객관을 두어 일본의 사신과 상인을 관리하고 안내하는 등 대일 교류의 창구 역할을 담당하였다.

[유학 교육과 불교문화]

조선 전기에 편찬된 『경상도지리지』[1425]의 경상도 총설에서는 경상도 모든 고을의 풍속을 간결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김해의 풍속에 대해서는 “굳세고 꾸민데 없이 수수하며, 농사에 힘쓰고 배우기를 좋아한다.[俗尙强簡力農好學]”고 하였다. 용맹·순박·근면·호학(好學), 이는 고려 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김해 지역 사회의 특성이자 자랑이었다. 김해 지역의 교육 열풍은 도요저(都要渚) 주민들의 열망에서도 확인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는 도요저 주민들이 “마을에서 힘써 배워 과거에 오른 자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앞다투어 힘써 학당을 짓고, 여럿이 모여서 글을 읽는데 과거에 응시하는 자가 제법 많았다.”고 칭찬하였다.

김해향교는 이른 시기에 개교하여 고려 후기에는 더욱 확장되는 추세였다. 이곡(李穀)이 쓴 ‘김해부향교수헌기(金海府鄕校水軒記)’에 따르면, 김해부사 이국향(李國香)이 부임하여 향교의 부속 시설로 수헌(水軒)을 확장 건립함으로써 “예전에는 겨우 두 무릎만 들여놓을 수 있을 정도로 비좁았던 곳이 지금은 스승과 제자가 한 길의 간격을 두고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넓어져서 빈객의 자리나 사생(師生)의 자리가 모두 널찍하게 여유가 있게 되었다.”고 할 정도로 향교의 공간이 확장되었다. 고려 말에 이를수록 김해의 유학 교육은 더욱 심화되고 확산되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 시대 김해 지역사회에는 불교 문화가 융성하였고, 나말여초 선종산문인 봉림산문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진철대사(眞澈大師) 이엄(利嚴)은 911년(효공왕 12) 소율희의 초빙으로 김해부로 와서 4년 간 이 곳에서 주석하였다. 소율희는 김해의 경치 좋은 곳에 새로 절을 짓고 이엄을 이 곳에 머물도록 했다고 한다. 이엄이 주석한 이 사찰은 지역 주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경상도속찬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김해도호부 불우조에는 고려 시대 김해 지역 사회에 사찰이 여럿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불모산의 장유사(長遊寺), 신어산 동쪽 옥지연(玉池淵)의 감로사(甘露寺), 고을 북쪽 대사리에 있었던 금강사(金剛社), 신어산에 있었던 귀암사(龜巖寺)·십선사(十善寺)·청량사(淸涼寺)·이세사(離世寺), 운점산의 운점사(雲岾寺), 명월산에 있었던 진국사(鎭國寺)와 명월사(明月寺) 등이 이들이다.

감로사는 본래 조그마한 사찰이었으나, 원감국사 충지(冲止)가 주지를 맡으면서부터 전각이 여럿 들어서고, 고승 대덕이 모여드는 등 사찰의 규모가 크게 확장되었다고 한다. 금강사에는 ‘불훼루(不毁樓)’라는 누각이 있었고 산다수(山茶樹)로도 유명했다. 충렬왕이 여원연합군의 일본 정벌을 지원하기 위해 합포를 방문했을 때, 산다수가 온 뜰을 덮은 것을 보고 ‘장군’이라는 칭호를 내려주었고, 이것이 김해 장군차의 유래로 전하고 있기도 하다.

귀암사는 선종 계통의 사찰로서 현종원(懸鐘院)이라는 숙박시설도 운영하면서 교통과 여행의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이규보(李奎報)가 1198년(신종 1)에 쓴 ‘현종원중창기(懸鐘院重創記)’에 따르면, 현종원은 남쪽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무너진 지 오래되어 여행자가 묵을 수 없게 되었으므로, 동서로 왕래하는 자들이 이를 괴롭게 여겼다고 한다. 이에 김해부 향리가 가산을 시주하여 귀암사 승려들과 함께 이 곳을 중창했는데, ‘육중한 들보와 웅장한 마룻대로 그 내면을 장엄하게 하고 높은 문과 큰 중문으로 그 외면을 견고히 하며, 높은 담으로 둘러서 사방을 튼튼하게 막는’ 등 그 규모를 크게 일신하였다.

고려 시대 김해 지방에는 놀이 문화도 유행하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김해의 민속놀이가 되고 있는 석전(石戰)놀이가 그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김해도호부 풍속조에서는 “매년 4월 초파일부터 아이들이 무리지어 모여서 성 남쪽에서 석전을 연습한다. 단옷날이 되면 장정이 모두 모여 좌우 패로 나누어서 기를 세우고 북을 두드리고 소리를 지르면서 비 쏟아지듯 돌을 던지며 뛰놀아 승부가 결판날 때까지 그치지 아니한다. 비록 죽거나 다치는 사람이 생기더라도 후회하지 않아서 수령도 금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김해 사람들의 용맹스러움과 외세 침입에 맞서 싸웠던 전쟁 경험이 이러한 놀이 문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금주에서 김해도호부로]

12세기 말 이후 고려 사회는 계속되는 농민 항쟁, 장기간의 여몽전쟁, 그리고 외세에 저항한 삼별초 항쟁,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 왜구의 침입 등 내외적 충격을 경험하였다. 이같은 내외적 충격은 지역 사회 변화의 동인으로 작용하면서, 군현의 위상에도 영향을 미쳐 지역 사회의 변화를 가져왔다. 김해 지역에서는 1200년(신종 3) 8월, 일반 주민이 토호 세력인 향리를 공격하는 이른바 ‘잡족인의 봉기’가 발생하여 지역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여몽전쟁에 이어 벌어지는 삼별초 항쟁에서 김해 지역도 삼별초 공격의 대상 지역이 되었다. 1271년(원종 12) 4월 삼별초는 김해를 공격하여 불사르고 노략질하는 등 김해를 초토화시켰다. 그 기세가 얼마나 세었는지 방호장군 박보(朴保)와 별초군은 겁먹고 달아나 산성으로 몸을 숨길 정도였다. 삼별초 항쟁이 진압되며 원의 내정 간섭이 본격화되었고, 김해 지역 사회는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을 위한 전진 기지가 됨으로써 정벌군의 동원과 전함의 건조, 군량 확보 등의 부담을 가장 많이 질 수밖에 없었다. 가혹한 조세와 역역 수취, 토지의 황폐화로 말미암아 유망민이 많이 발생하여 지역 사회가 공동화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고려 후기 왜구의 침입은 다시 한번 김해 지역 사회에 충격을 안겨 주었다. 김해 지역에 대한 왜구 침입은 13회 정도로, 경상도 연해 지역에서는 고성 지역과 함께 가장 많이 침입당한 곳이다. 1375년(우왕 1) 11월 왜구 침입에서는 김해 지역 행정 중심인 관아와 성문이 모두 불타는 피해를 입었다. 왜구 침탈은 인명 살상, 촌락 파괴, 관청 방화, 농토의 황폐화, 인구 이동 등을 불러와 지역 사회의 변동을 초래케 하는 요인이 되었다.

국내외 충격으로 김해 지역 사회가 동요하는 가운데, 거점 도시 금주에 편입되었던 속읍들이 12세기 말부터 하나씩 빠져나가 독립하기 시작했다. 1172년(명종 2) 전국의 속읍 가운데 일부 지역에 임시 지방관인 감무를 파견할 때, 김해의 속읍인 함안군과 의안군, 합포현에도 감무가 파견됨으로써 이들 세 고을이 먼저 금주의 관할에서 떨어져 나갔다. 칠원현은 조선 건국 직전인 1390년(공양왕 2)에 감무가 파견되어 김해로부터 분리되었다. 이렇게 하여 금주의 7개 속읍 가운데 웅신현과 완포현 두 곳만 조선 초기까지 김해의 속읍으로 남게 되었다. 웅신현과 완포현도 조선 문종때 웅천현으로 독립하였다.

김해 지역 속읍들이 분리 독립하는 가운데 김해의 읍격에도 변화가 있었다. 1271년(원종 12) 1월 밀양에서 일어난 삼별초 호응 봉기를 방어사 김훤(金晅)이 평정한 공으로 김해를 김녕도호부(金寧都護府)로 승격시켰다. 1293년(충렬왕 19) 안렴사 유호(劉顥)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김녕현으로 강등시켰다가, 1308년(충렬왕 34) 금주목(金州牧)으로 승격시키고, 1310년(충선왕 2) 김해부로 고쳐 고려 후기까지 읍격이 유지되었다. 조선 건국 후에도 잠시 김해부로 있다가 1413년(태종 13) 전국적인 군현 통폐합 조치에 따라 마침내 김해도호부로 승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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