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550
한자 新山書院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산해정길 123-26[주동리 737]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현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609년 - 신산서원 사액
개축|증축 시기/일시 1830년 - 신산서원 강당 중수
훼철|철거 시기/일시 1868년 또는 1871년 - 신산서원 훼철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99년 6월연표보기 - 신산서원 복원
현 소재지 신산서원 -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산해정길 123-26[주동리 737]지도보기
성격 서원
양식 팔작지붕|목조 기와
정면 칸수 5칸
측면 칸수 2칸
관리자 김해향교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주동리에 있는 조선 후기 서원.

[개설]

신산서원(新山書院)남명(南冥) 조식(曺植)과 신계성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조선 후기에 건립한 서원이다. 조식은 1528년(중종 23) 아버지의 상을 마친 후, 1530년(중종 25)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처가가 있는 김해 신어산(神魚山) 아래 탄동(炭洞)[일명 주부동(主簿洞)]으로 이주하여 산해정(山海亭)을 지었다. 산해정의 이름은 ‘높은 산에 올라 바다를 굽어본다’는 말로,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넓은 학문의 경지를 이루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거처하는 방은 『주역(周易)』「이괘(離卦)」에서 “밝음이 두 번 만들어짐이 이괘이니, 대인은 이를 본받아 밝음을 이어서 사방에 비추는 것이다[明兩作離, 大人以繼明, 照于四方]”라고 한 것을 따라 ‘계명실(繼明室)’이라 이름 지었다.

조식은 48세에 합천 삼가로 돌아갈 때까지 산해정에서 18년 동안 청향당(淸香堂) ’이원(李源), 송계(松溪) 신계성(申季誠),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 대곡(大谷) 성운(成運) 등과 학문을 강론하며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후 1588년(선조 21) 안희(安憙) 등이 산해정 아래 동쪽 산기슭에 서원을 건립하던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모두 소실되었다. 1818년(순조 18) 송윤증과 류방식, 조석권 등이 산해정을 복원하였으나, 1866년(고종 3) 서원 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 또는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다. 1890년(고종 27)에 산해정을 복원하였으며, 1985년 1월 14일 ‘김해 산해정(金海 山海亭)’이라는 명칭으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25호로 지정되었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 「문화재 지정[등록]번호 삭제 및 문화재명 표기 방식 변경 고시」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는 삭제되었으며, 2024년 5월 17일 국가유산청의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에 따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에서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로 변경되었다.

[위치]

신산서원김해시 대동면 주동리 737번지에 있다.

[변천]

1608년(선조 41) 황세열(黃世烈)과 허경윤(許景胤)이 산해정 터에 서원을 중건하고, 1609년(광해군 1) ‘신산서원’으로 사액을 받아 조식을 배향하였다. 1619년(광해군 11)에는 밀양 지역의 신계성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1830년(순조 30) 강당을 중수하였으며, 1866년 서원 철폐령으로 1868년 또는 1871년에 산해정과 함께 훼철되었다. 이후 1999년 6월 김해시가 신산서원을 복원하였고, 산해정 복원 당시 모시지 않았던 신계성을 다시 배향하였다.

[형태]

강당의 정면은 5칸, 측면은 2칸이며, 팔작지붕을 갖춘 목조 기와 건물이다. 가운데 2칸은 마루이고, 왼쪽 2칸과 오른쪽 1칸은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문인 진덕문(進德門)이 있고, 강당 앞쪽 좌우에는 유의재(有義齋)와 환성재(喚醒齋)가 있다. 강당의 뒤편에는 숭도사(崇道祠)가 있다.

[현황]

1999년 복원 당시의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 관리자는 김해향교이며, 매년 음력 3월 16일 숭도사에서 향례를 봉행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신산서원은 김해 지역이 남명학(南冥學)의 출발지라는 상징성을 지닌 장소이며, 더 나아가 경남학에서 김해 지역이 갖는 학문적 위상을 드높일 수 있는 곳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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