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5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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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海 加耶人 生活 體驗村 敷地 內 遺蹟 |
영어공식명칭 | Historic Site of Kaya People´s Life Experience Villag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봉황동 466-4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려/고려,조선/조선 |
집필자 | 양화영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1년 10월 8일~2001년 12월 10일 - 김해 가야인 생활 체험촌 부지 내 유적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에서 시굴 조사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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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2년 4월 4일~2002년 11월 29일 - 김해 가야인 생활 체험촌 부지 내 유적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에서 발굴 조사 실시[2002]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3년 4월 4일~2003년 10월 11일 - 김해 가야인 생활 체험촌 부지 내 유적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에서 발굴 조사 실시[2003] |
현 소재지 | 김해 가야인 생활 체험촌 부지 내 유적 - 경상남도 김해시 봉황동 466-4 |
출토 유물 소장처 | 국립김해박물관 - 경상남도 김해시 가야의길 190[구산동 232] |
성격 | 복합 유적|생활 유적 |
크기(높이,길이,둘레) | 99㎝~144㎝[삼국 시대 가마 너비]|27㎝~770㎝[삼국 시대 인공 구덩이 길이]|26㎝~520㎝[삼국 시대 인공 구덩이 너비]|230㎝~840㎝[삼국 시대 지상식 건물터 길이]|180㎝~550㎝[삼국 시대 지상식 건물터 너비]|4m[삼국 시대 토루 기저부 폭]|1m[삼국 시대 토루 기저부 높이]|4m~9m[고려 시대~조선 시대 호안 시설 폭] |
면적 | 4,500㎡[발굴 면적] |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 봉황동에 있는 삼국 시대 및 고려 시대·조선 시대의 생활 유적.
[개설]
김해 가야인 생활 체험촌 부지 내 유적(金海 加耶人 生活 體驗村 敷地 內 遺蹟)은 삼국 시대의 토성 및 생활 유적과 고려 시대·조선 시대의 하천 유적으로, 김해 가야인 생활 체험촌 부지에 포함되어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에 의해 문화재 조사가 이루어졌다. 유구의 존재 유무와 분포 범위 확인을 위한 시굴 조사는 2001년 10월 8일~동년 12월 10일 실시하였으며, 조사를 통해 삼국 시대의 인공 구덩이[수혈]와 기둥 구멍[주혈], 석렬 유구를 확인하였다. 발굴 조사는 시굴 조사에서 유구를 확인한 구역[4,500㎡]에 대하여 2002년 4월 4일~동년 11월 29일, 2003년 4월 4일~동년 10월 11일 두 차례에 걸쳐 진행하였다. 조사 결과 삼국 시대의 봉황토성 일부와 건물터, 인공 구덩이, 경작층, 기둥 구멍, 가마와 고려 시대·조선 시대의 하천, 호안 시설을 확인하였다. 삼국 시대의 상층 및 하층 문화층과 고려 시대·조선 시대의 문화층을 확인하였는데, 삼국 시대의 문화층은 고려 시대에 형성된 하천에 의해 동서[A·B]로 양분된다. A구간은 3세기~4세기의 가마 조성층과 4세기~5세기의 문화층, 6세기 대의 문화층으로 구분되어 복잡한 양상이다. B구간은 4세기~5세기의 문화층과 6세기~7세기의 문화층으로 구분되는데, 하층에서 봉황토성 기저부(基底部)와 토루(土壘) 시설, 토기 가마, 고상식 건물터를 확인하였고, 상층에서는 6세기 이후의 인공 구덩이와 경작지를 확인하였다.
[위치]
김해 가야인 생활 체험촌 부지 내 유적은 김해시 봉황동 466-4번지에 있다. 야트막한 봉황대 구릉[46.5m]의 서쪽 저지대에 해당하는 충적지에 자리하며, 연접한 서쪽으로는 해반천(海畔川)이 관류하고 있다. 유적의 동쪽으로는 김해 봉황동 유적(金海 鳳凰洞 遺蹟)[사적]과 김해 회현리 조개더미, 봉황동 조개더미 등 동 시기의 많은 유적이 분포하고 있다.
[형태]
1. 삼국 시대의 가마와 인공 구덩이
삼국 시대 가마는 A구간에서 4기를 확인하였다. 장축 방향은 동-서향이며, 너비 99㎝~144㎝인 반지상식 구조이다. 가마는 폐기 후 의도적으로 매몰하였는데, 일정 기간 동안 반복하여 사용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영 시기는 3세기 후반~4세기 전반이다. 인공 구덩이는 31기를 확인하였는데, A구간의 서쪽과 B구간의 지상식 건물터 위쪽에 조성되었다. 평면 형태는 장타원형과 말각 방형, 장방형, 부정형 등 다양하며, 규모는 길이가 27㎝~770㎝, 너비가 26㎝~520㎝이다. 일부 인공 구덩이는 지상식 건물터들이 폐기된 후 6세기경에 이루어진 토취(土取) 행위의 결과로 보이지만, 5세기 대 유물도 함께 출토되고 있어 하층의 건물터와 관련한 시설일 가능성도 높다.
2. 삼국 시대의 지상식 건물터와 기둥
지상식 건물터는 A구간과 B구간에서 확인하였는데, 고하천 양쪽 미고지(微高地)[가는 모래가 두껍게 퇴적된 땅]에 배치되어 있다. 평면 형태는 장방형과 방형이 대부분이며, 육각형도 1동 확인하였다. 장축은 동-서축이며, 형식은 4주식과 6주식, 9주식, 11주식, 12주식 등으로 다양하다. 규모는 길이가 230㎝~840㎝, 너비가 180㎝~550㎝로 크기에 따라 대중소로 구분된다. 중심 기둥과 중복되어 있거나 연접한 기둥 구멍은 대부분 보조 기둥으로, 출입구와 보조 시설물, 지붕 하중을 지탱하기 위한 동지주 건물일 가능성이 높다. 지상식 건물터는 평면상 중복은 확인되지 않지만, 개별 건물터와의 거리 차가 좁아 동 시기에 사용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으며, 약간의 시기 차를 둔 상하의 중복도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기둥 구멍의 내부는 주춧목과 목주가 양호한데, 기본적인 구조는 지면을 판 후 바닥에 편평한 목재를 놓고 그 위에 통나무를 세운 형태이다.
기둥은 구덩이를 파서 바닥에 20㎝ 내외로 정지토를 깔고 기둥의 침하 방지를 위해 주춧목을 설치한 후, 그 위에 주 기둥을 세우고 흙을 채워 고정하였다. 주춧목 외에 주춧돌을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B구간 5호 건물터 1기만 확인되었다. 5호 건물터는, 기본적인 구조는 주춧목과 같은데 최상단을 주춧돌로 축조한 것이다. 지상식 건물터의 목주는 대부분 기둥 구멍의 중앙에 배치하였지만, 목주를 구덩이 한쪽 벽에 붙여서 기대어 지탱하고 각목을 대어 보관한 것도 있었다. 또 주춧돌의 설치 방법은 다양하나, 대부분은 목주가 놓이는 마지막 주춧돌의 높이를 일정하게 맞추었다. 유적에서 사용된 목재의 수종은 굴피나무류가 가장 많고, 소나무류와 밤나무, 졸참나무류, 느티나무류, 엄나무의 6종이 확인되었다. 목주는 직경 15㎝~65㎝로 두께가 다양하며 원통 형태인데, 대형은 주 기둥, 소형은 보조 기둥으로 사용하였다. 주춧목은 판재와 환재, 각재로 구분되며, 상부 구조물의 건축 부재를 재사용한 것도 다수 확인하였다. 유적에서 출토된 목주와 주춧목은 원목을 벌채한 후, 별다른 가공 없이 나무껍질을 제거하고 도구를 이용하여 단부를 마무리하거나, 원목을 각재나 판재로 단순 가공한 것이 대부분이다.
3. 삼국 시대의 토루와 호안 시설
체성의 양 경계를 이루는 석렬의 외곽으로서 토루로 추정되는 시설물을 확인하였다. 토루는 회흑색 니질토 위에 할석과 나무를 얹은 후, 회흑색 니질토와 담갈색 점토를 교대로 쌓아 반구형에 가깝게 성토하고 그 위에 촘촘하게 말뚝을 박아 만들었다. 토성과 토루 사이의 도랑[구]은 자연스럽게 해자(垓子)의 기능을 하였는데, 토루 기저부의 규모는 폭이 4m, 높이가 1m이며, 해자의 상부 폭은 4m이다. 또 토성과 토루 간의 거리는 3m인데, 토루의 북쪽은 고려 시대 하천에 의해 파괴되었다. 봉황대 기저부를 일주하는 4세기~5세기 대 토성이 있었고, 토성의 외곽으로 토루 시설과 해자 등 관련 시설물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또 호안 시설은 B구간 경작지 동쪽에서 남북 방향으로 일렬로 있는 목책으로 확인되는데, 북쪽 건물터 아래로 연결되어 건물터보다 먼저 조성된 것이다. 목책은 상부가 유실된 동쪽의 하천 변에 설치한 호안 시설로 추정된다.
4. 삼국 시대의 경작지
경작지는 B구간의 건물터 남쪽에 위치하는데, 규모는 길이 20m, 너비 10m 정도로 확인된다. 경작지 안에서 고랑과 두둑이 확인되며, 두 차례 정도 반복적으로 경작하였다. 경작지 안 두둑의 폭은 60㎝~80㎝이며, 고랑의 폭은 60㎝~80㎝, 깊이는 5㎝ 내외이다. 식물 규산체 분석 결과 맥류가 소량 검출되었으나, 벼과도 검출되어 밭의 형태를 가진 논으로 추정된다.
5. 고려 시대~조선 시대의 호안 시설과 하천
고려 시대의 하천과 호안 시설은 해반천과 나란하게 조성되었는데, 하천은 조선 시대까지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하천은 해반천과 평행하며, 봉황대 구릉을 따라 흐르고 있다. 폭 18m~30m의 하천에 의해 삼국 시대 유적이 양분되었으며, 하천 서쪽 경계를 따라 호안 시설이 확인되었다. 호안 시설은 서쪽 벽을 굴착한 다음 기와와 돌무지[적석], 나뭇가지를 깔고 그 위에 흙을 덮은 후, 양 가장자리를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목주를 박은 형태이다. 호안 시설의 폭은 4m~9m이며, 물의 확보와 하천의 범람을 막기 위한 제언(堤堰) 시설로 추정된다. 사용 시기는 고려 후기~조선 초기이다.
[출토 유물]
목재 57점과 수습 유물 154점을 포함하여 679점이 출토되었는데, 토기류의 비중이 가장 많다. 특히 시루와 장란형 토기, 이동식 부뚜막으로 사용된 아궁이 모양 토기와 솥 모양 토기[부형 토기] 등 취사용 토기와 야요이계·하지키계의 왜계 유물이 특징적으로 많이 출토되었다. 유물의 기종은 굽다리 접시와 짧은 목 항아리[단경호], 뚜껑, 시루, 솥 모양 토기, 부뚜막 모양 토기, 뚜껑, 바리 등으로 다양하다. 출토된 유물의 중심 시기는 4세기~5세기 대이다. 삼국 시대의 목재 유물 57점은 대부분 주춧목과 목주로, 가공 흔적이 잘 남아 있다. 유적에서 확인한 주줏목과 목주는 별다른 가공 없이 단부를 마무리하거나 단순 가공한 것이 대부분이다. 또 고려 시대~조선 시대의 호안 시설 내부에서 기와 조각과 청자 조각, 분청사기 조각, 백자와 ‘대산석[좌]도환[와]초(大山右[左]徒丸[瓦]草)’, ‘동면(東面)’, ‘성서면속와(成西面屬瓦)’ 등의 명문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조성 시기는 고려 후기~조선 전기이다.
[현황]
김해 가야인 생활 체험촌 부지 내 유적은 발굴 조사 완료 후 현지 보존하였으며, 출토 유물은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소장하여 관리하고 있다. 현재 유적을 포함한 김해 봉황동 유적 자리에는 봉황대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시민들이 휴식 공간으로 이용하고 있다. 공원 내에 발굴 조사한 고상 가옥 3채와 망루 1채를 복원하였고, 가야 시대 배를 제작·설치하여 김해 시민들이 가야 시대의 유적과 환경을 간접 경험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 발굴 조사 당시의 유적에 대한 설명과 사진을 첨부한 국가유산 알림판을 세워 놓아 시민들에게 관련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의의와 평가]
김해 가야인 생활 체험촌 부지 내 유적은 봉황토성과 토성 밖의 저습지에 형성된 고상식 건물터로 이루어진 특수한 생활 유적으로, 지금의 해반천과 봉황대 사이에 저습지가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유적에서 다량으로 출토된 이동식 부뚜막은 고상식 건물터와 상관 관계를 가진다. 많은 왜계 유물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당시 김해 지역이 동아시아 교류의 결절지로서의 역할을 하였고, 김해 가야인 생활 체험촌 부지 내 유적은 그 교류의 관문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김해 가야인 생활 체험촌 부지 내 유적은 추후 김해 봉황동 유적에서 발굴 조사된 삼국 시대 유적과의 비교 검토를 통해, 금관가야의 자료에 대한 집성과 역사적 경관을 복원하는 데 기초 자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