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020 |
---|---|
한자 | 金海- 漢詩- 文人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영숙 |
[정의]
가야의 고도 경상남도 김해를 다룬 고전 한시와 문인 .
[개설]
김해는 가야국의 고도로 가야의 유적이 많다. 그러나 기록으로만 전할 뿐 현존하지 않는 명승과 유적 또한 많아 그 원형은 현전하는 문학 작품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문헌과 유적을 통해 전래되어 온 설화, 고사(故事), 풍속, 역사, 전경 등은 문학 작품에 고스란히 수용되어 김해의 옛 모습을 재현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김해를 읊은 한시와 문인들을 살펴봄으로써 김해가 간직한 역사와 인물을 알고, 지역이 지닌 정체성에 대해 인식하고, 더 나아가 현재의 김해를 이해하는 토양이 될 수 있다.
[김해의 명승과 지역을 소재로 지은 한시]
「금관기속시(金官紀俗詩)」는 낙하생(落下生) 이학규(李學逵)[1770~1835]의 시로서 『낙하생전집』13책에 나오며, 김해의 역사 고적에서부터 민풍과 세시 풍속, 김해인의 생활상, 김해 지방의 물산 등을 소재로 하고 있다. 옛 가락국(駕洛國)의 고적과 김해 지방의 지역 환경, 김해인들의 경제 생활과 그 물산들, 김해의 풍습과 세시 풍속, 조선 후기 향촌 사회의 변화와 그에 따른 인간 군상을 묘사하고 있다. 낙동강 하구의 농촌과 어촌의 모습, 염전을 배경으로 하는 김해인의 애환과 삶의 현장이 묘사되어 있다. 조선 후기 김해 지역이 안고 있는 제반 문제점과 민생에 대한 횡포와 당시에 대한 사회적 모순점 들을 지적한 내용이 많다.
「김해회고(金海懷古)」는 김안국(金安國)[1478~1543]이 김해가 가야국의 고도라는 점에 흥기하여 그 흥망성쇠(興亡盛衰)의 처연한 감정을 읊었다. 파사의 고탑과 수로왕릉에서 옛 가야의 흥성(興盛)을 보고, 강남제비와 산유화에서 그 쇠락(衰落)을 보고, 그럼에도 옛 가락은 여전히 남아 처연한 감정에 빠지게 되는 감정을 읊었다.
「산해정(山海亭)」은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1495~1544]의 시로서 『무릉잡고』 권2에 나오며,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을 창건한 주세붕과 조선 유림의 정신을 대표하는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이 산해정에서 조우하여 시로 창수한 것은 역사적 의미를 지닌 행적이다. 이 시는 그 행적의 현장을 증명하는 자료로서의 의미를 지니며, 김해의 산해정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문학 작품이다. 문학과 현장이 공존하며, 시공간을 초월하여 현대까지 계승된 선비 정신과 그들의 교유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연자루(燕子樓)」는 명암(明庵) 정식(鄭栻)[1683~1746]의 시로서 『명암집』 권2에 나오며, 연자루의 원경과 근경을 목공의 섬세한 손재주로 정교하게 다듬어진 건물임을 그려내어 현존하지 않는 연자루의 실경(實景)이 어떠했는지 상상해 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다.
「영남악부(嶺南樂府)」는 낙하생 이학규의 시로서 『낙하생전집』 권6에 나오며, 자국사에 대한 역사 인식, 전환기 역사 인물에 대한 평가, 설화와 역사의 만남, 탐관오리의 폐정, 여성의 삶과 정서, 백성을 수탈한 관리의 부패한 실상, 왕과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친 충신, 기이한 사적이 있는 역사적 인물, 영남 지역의 민풍과 토속 등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종죽산해정(種竹山海亭)」은 남명 조식의 시로서 『남명집』 권1에 나오며, 대나무를 굳이 풍상을 이기는 절의(節義)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진실함만으로 보아도 그 참다운 모습이 아름답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증김해기옥섬섬(贈金海妓玉纖纖)」은 재상 야은(壄隱) 전녹생(田祿生)[1318~1375]의 시로서 『야은일고』 권1에 나오며, 계림판관(雞林判官)이 되었을 때 김해 기생 옥섬섬(玉纖纖)에게 준 시로, 연자루와 기생 옥섬섬 등 김해의 대표적인 정경과 일화의 증거가 된다.
「함허정강회(涵虛亭講會)」는 성재(性齋) 허전(許傳)[1827~1885]의 시로서 『성재집』 권1에 나오며, 김해도호부사로 부임하여 김해 지역뿐 아니라 경상우도 지역에 근기(近畿) 남인계(南人系)의 학문을 전승한 성재 허전이 지금은 현존하지 않는 함허정에서 강회를 하며 지은 시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다.
「금관십육영(金官十六詠)」은 방산(舫山) 허훈(許薰)[1836~1907]의 시로서 『방산집』 권2에 나오며, 남포의 갈대꽃[南浦蘆花], 흥부암의 저녁 종소리[興菴暮鐘], 덕교의 행인[德橋行人], 분산성의 수루[盆山戍樓], 해반천의 향기로운 풀[海畔芳草], 고서문 밖 내영지[古西影池], 봉래로 돌아가는 구름[蓬萊歸雲], 잠두봉 새벽 산기운[蠶頂曉嵐], 호계천 빨래터[虎溪浣砧], 금강사의 영차[金剛靈茶], 파사고탑[婆娑古塔], 금암의 푸른 대[金巖翠篁], 명호의 염전연기[鳴湖鹽煙], 선암의 저녁 조수[仙巖晩潮], 형포의 내려앉은 갈매기[衡浦落鴈], 매정의 목동피리[梅亭牧笛] 등 김해의 명승 16곳을 읊은 작품이다.
「가락회고(駕洛懷古)」는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1873~1933]의 시로서 『암서집』 권6에 나오며, 수로왕(首露王)에서 시작하여 수로왕의 능과 그 부인 허황후(許皇后)의 능, 수로왕 즉위부터 시작된 가락국 왕궁터라고 전해지는 봉황대(鳳凰臺), 옛 김해부(金海府)의 공루(公樓)였던 연자루(燕子樓), 김해 사람으로 알려진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1287~1367], 삼차강(三叉江), 칠점산(七點山)에 대해 읊은 작품이다.
「경차성재허선생함허정강회운(敬次性齋先生涵虛亭講會韻)」은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1855~1931]의 시로서 『소눌집』 권1에 나오며, 12살의 나이에 성재 허전을 찾아 면학(勉學)할 것을 맹세하고, 도학의 깊이에 대해 깨달아 가는 노상직의 자세를 보여 주는 시이다. 지금은 현존하지 않는 함허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강회와 허전의 불권당에서 이루어진 강학 등 일제 강점기 경상우도 지역에서 이루어진 ‘강회(講會)’를 유추할 수 있다.
[김해 소재 한시의 함의]
이학규의 시는 상품 화폐 경제가 발전한 조선 후기 사회의 변모 양상을 집약적으로 보여 주고 있으며, 지방 향촌 사회의 지역적 특징과 지역민의 생활상을 본격적으로 한시 제재로 수용하였다. 민족 고유의 전통문화에서 소재를 취하였으며, 조선시의 구체적 실천이라 할 수 있다. 김안국은 16세기 김해의 정경(情景)을 묘사하여 가야에 대한 인식을 유추할 수 있게 하였으며, 주세붕과 남명의 조우를 읊은 시는 함의라기보다 당시를 연상할 수 있게 하는 묘사를 구사하고 있다. 정식의 시는 청정하고 진솔하며, 시상이 다채롭고 진지하다. 그리고 사물의 묘사가 핍진(逼眞)하여 실경을 보는 듯하다. 「영남악부」에서 이학규는 국토의 옛 역사와 인물들을 고증을 통해 객관적이고 사실적으로 기록하고, 생동하는 기층민의 생활상을 탁월하게 묘사하였다. 고려 때의 재상 야은 전녹생이 김해의 연자루에서 노닐며 기생 옥섬섬에게 준 시는 김해의 설화와 고사를 풍부하게 하였으며, 다양한 스토리텔링(storytelling)이 가능하게 하여 문화사적인 의미도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방산 허훈은 김해의 승경에 대해 작가의 주관적 정감의 개입을 배제하고, 산수 자연의 세심한 관찰을 통해 경물의 참모습을 묘사하고자 하였다. 산천 경물에 대한 핍진한 묘사를 중시한 작가의 창작론이 잘 드러난 시작(詩作)으로 김해 산수의 진경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김해도호부사로서 김해의 문풍은 진작시킨 성재 허전과 그를 사사한 소눌 노상직의 묘사는 함의보다는 실정(實情)을 정확하게 묘사하였으며, 심재 조긍섭은 김해의 역사와 풍광, 지형, 풍속 등 근대 전환기와 일제 강점기까지 현존하였던 고도(古都)로서의 김해를 형상화한 시로 문학의 역사성을 표상하였다.
[김해 소재 한시에 내포된 김해의 역사와 기록]
이학규의 작품은 문학성이 부각되는 작품으로 민족의식(民族意識)과 애민 의식, 현실 비판 의식이 특징적으로 나타났다. 민족의식은 주로 금관 지역의 역사 유적지를 바라보는 시선과 민족 고유의 풍속을 제재로 지은 작품들을 통해서 표출된다. 수로왕의 탄생 설화가 얽힌 구지봉의 의연한 모습 등 김해가 신라의 고도인 경주와 비슷한 처지로 오랜 풍상과 전란을 겪으면서 옛 모습은 변했지만 여전히 현존하는 가락의 고적과 옛 왕성의 웅장했던 기풍을 읊었다. 이학규는 이러한 역사적 전통이 조선 역사의 한 부분이라 자각하고 역사 현장을 시화하였다. 애민 의식을 표출함에 있어서는 지역 하층민의 생활 현장에 밀착하여 그들의 삶의 양식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였다. 자신이 처한 현실에서 어려운 생활 현장에 촉발되어 수식과 과장을 가미하지 않으면서 애민의 목소리를 자연스럽게 표출하였다.
남명 조식과 신재 주세붕의 작품은 문학과 현장이 공존하며, 시공간을 초월하여 현대까지 계승된 선비 정신과 그들의 교유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남명 조식의 시작은 그의 선비 정신을 표상할 뿐만 아니라 김해 산해정과 신산서원에서 이루어졌던 그의 강학 활동도 유추할 수 있게 한다. 김해도호부사로 부임하여 김해 지역뿐 아니라 경상우도 지역에 근기 남인계의 학문을 전승한 성재 허전의 행적 또한 시에 묘사되어 역사적 기록으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이밖에 심재 조긍섭, 소눌 노상직, 방산 허훈 등 근대 전환기와 일제 강점기 김해를 무대로 활동했던 유학자의 삶과 행적을 이 시들을 통해 조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