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3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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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豪族 |
영어공식명칭 | Local Gentr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고려/고려 전기 |
집필자 | 김광철 |
[정의]
신라 후기 고려 전기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 사회 변동을 주도적으로 이끈 지방 세력.
[개설]
신라 후기 농민 항쟁이 전개되는 가운데 전국 각 지역에서는 ‘성주(城主)’, ‘장군(將軍)’이라 불리는 지방 세력, 즉 호족이 등장하고 있었다. 그 출신은 해상 세력, 촌주 출신, 지방관 및 낙향 귀족, 군진 세력 등 다양하였다. 이들은 호부층(豪富層)으로서 경제적 기반을 갖고 있다가 항쟁 세력을 끌어들여 군사적 기반을 갖추고 호족으로 성장하였다. 호족은 당대등(堂大等)·대등(大等) 관할하에 호부(戶部)·창부(倉部)·병부(兵部)로 구성된 독자적 행정 조직인 관반체제(官班體制)를 갖추고 지역을 지배하였다.
[김해 호족]
신라 후기에는 전국적으로 농민 항쟁이 발생하고 있었다. ‘군도(群盜)’, ‘도적(盜賊)’, ‘초적(草賊)’으로 지목된 항쟁 세력은 9세기 후반이 되면 대규모로 조직화된 농민군이 되어 전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봉기하였다. 신라 후기 김해 지역의 항쟁 사례는 확인되지 않지만, 농민 항쟁의 물결은 소경(小京)이었던 김해 지역에도 밀려 들고 있었다. 그것은 당시 김해 지역에 유력한 호족(豪族)이 등장하여 지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데에서 엿볼 수 있다.
신라 후기 선종 승려의 비문들은 당시 김해 지역 사회에도 유력한 호족이 활동하고 있었음을 전해주고 있다. 「봉림사진경대사보월능공탑비(鳳林寺眞鏡大師寶月凌空塔碑)」에는 지김해부 진례성제군사 명의장군(知金海府 進禮城諸軍事 明義將軍) 김인광(金仁匡)과 진례성제군사(進禮城諸軍事) 김율희(金律熙)란 이름이 보이고, 「태자사낭공대사비(太子寺郞空大師碑)」에서는 지부(知府) 소충자(蘇忠子) 공과 그 동생인 영군(領軍) 소율희(蘇律熙) 공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김해 지역의 호족은 소충자·소율희 형제와 김인광 등으로, 진례성을 중심으로 ‘지김해부 진례성제군사(知金海府進禮城諸軍事)’의 지위를 가지고 김해 지역을 지배하였다. 이들은 당시 창원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대표적 선종 사원인 봉림산문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김해-창원 일대에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김인광은 소경의 관리이거나 가야 왕족의 후예로 이해된다는 점에서, 낙향 귀족 출신이거나 그와 유사한 사회적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소충자·소율희 형제는 김인광과는 달리 당나라와의 교역 활동을 통해 부를 축적하여 호부층이 되었고,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군사력을 확보하여 김해 지역의 호족으로 성장하였다.
[호족 동향]
김해 지역 호족들 사이에는 협조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도 있었겠지만, 지배 영역의 확장을 위해 갈등 관계를 보이면서 정복 전쟁을 벌였을 가능성이 높다. 『가락국기(駕洛國記)』에서 묘사한 것처럼, 잡간(迊干) 충지(忠至)와 가야 왕족 간에 제사권을 둘러싼 다툼은 소충자·소율희 형제가 김인광이 지배하는 영역까지 진출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갈등 관계로 해석될 수 있다.
신라 후기 사회변동기에 김해 지역의 읍격은 ‘김해소경’이 아니라 ‘김해부’였다는 사실도 주목된다. 신라 중앙 정부는 지역에서 지방 세력이 등장하자, 현실을 인정하고 김해소경을 김해부로 개편하여 호족이 실질적으로 지역을 관할하게 하면서도 신라 정부의 통제를 수용하게 하는 타협책을 모색한 것이었다.
후백제, 후고구려[태봉], 고려가 차례로 건국되면서 호족 세력은 독자성을 유지한 채 이들 중세 국가 속에서 통합되었다. 후삼국 간에 전쟁이 시작되면서 호족 세력은 정복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920년(태조 3년) 10월, 견훤은 신라를 침공하여 오늘날 경상남도 합천 지역인 대량군(大良郡)과 창원 지역인 구사군(仇史郡) 두 곳을 빼앗고, 진례군(進禮郡)까지 진출하였는데, 이후 김해 지역 호족들은 상당 기간 후백제의 통제를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