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565
한자 金海 鳳凰洞 遺蹟
영어공식명칭 Bonghwang-dong Historic Site, Gimhae
이칭/별칭 봉황동 유적,봉황대 유적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유적(일반)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봉황대길 39-32[봉황동 253]
시대 고대/삼국 시대/가야
집필자 이동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07년 - 김해 봉황동 유적 조선총독부에서 발굴 조사 실시[1907]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14년 - 김해 봉황동 유적 조선총독부에서 발굴 조사 실시[1914]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15년 - 김해 봉황동 유적 조선총독부에서 발굴 조사 실시[1915]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17년 - 김해 봉황동 유적 조선총독부에서 발굴 조사 실시[1917]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20년 - 김해 봉황동 유적 조선총독부에서 발굴 조사 실시[1920]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22년 - 김해 봉황동 유적 조선총독부에서 발굴 조사 실시[1922]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34년~1935년 - 김해 봉황동 유적 조선총독부에서 발굴 조사 실시[1934~1935]
문화재 지정 일시 1963년 1월 21일연표보기 - 김해 봉황동 유적 사적 제2호 지정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2년~1993년 - 김해 봉황동 유적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 실시[1992~1993]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8년 - 김해 봉황동 유적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 실시[1998]
발굴 조사 시기/일시 1999년 - 김해 봉황동 유적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 실시[1999]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0년 - 김해 봉황동 유적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 실시[2000]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1년 - 김해 봉황동 유적 경남발전연구원에서 발굴 조사 실시[2001]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2년 - 김해 봉황동 유적 경남발전연구원에서 발굴 조사 실시[2002]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3년 - 김해 봉황동 유적 경남발전연구원·경남고고학연구소에서 발굴 조사 실시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4년 - 김해 봉황동 유적 경남고고학연구소·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 조사 실시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5년 - 김해 봉황동 유적 경남고고학연구소·대성동고분박물관에서 발굴 조사 실시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6년 - 김해 봉황동 유적 대성동고분박물관·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조사 실시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08년 - 김해 봉황동 유적 동서문물연구원에서 발굴 조사 실시[2008]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1년 - 김해 봉황동 유적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서 발굴 조사 실시[2011]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3년 - 김해 봉황동 유적 동서문물연구원·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서 발굴 조사 실시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4년 - 김해 봉황동 유적 동서문물연구원·두류문화연구원에서 발굴 조사 실시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5년 - 김해 봉황동 유적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서 발굴 조사 실시[2015]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5년~2023년 - 김해 봉황동 유적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 조사 실시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6년 - 김해 봉황동 유적 동서문물연구원에서 발굴 조사 실시[2016]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8년 - 김해 봉황동 유적 한국문화재보호재단·강산문화연구원에서 발굴 조사 실시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19년 - 김해 봉황동 유적 강산문화연구원에서 발굴 조사 실시
발굴 조사 시기/일시 2020년 - 김해 봉황동 유적 한화문물연구원·가경고고학연구소에서 발굴 조사 실시
현 소재지 김해 봉황동 유적 - 경상남도 김해시 봉황대길 39-32[봉황동 253]지도보기
출토 유물 소장처 국립김해박물관 - 경상남도 김해시 가야의길 190[구산동 232]지도보기
성격 취락|왕성
크기(높이,길이,둘레) 약 1,500m[봉황 토성 둘레]
면적 120,609㎡
소유자 김해시
관리자 김해시
문화재 지정 번호 사적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 봉황동에 있는 삼국 시대 가야의 핵심 취락이자 왕성 유적.

[개설]

김해 봉황동 유적(金海 鳳凰洞 遺蹟)은 기원전 2세기 대부터 기원후 6세기 대까지 가락국의 기원과 발전상을 보여 주는 핵심 취락이자 왕성(王城)으로, 일제 강점기부터 80여 차례 이상 발굴 조사하였다. 1907년(순종 1)과 1914년, 1915년, 1917년, 그리고 1920년과 1922년,1934년~1935년에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하였고, 1992년과 1993년, 1998년, 1999년, 2000년에는 부산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하였다. 이후 2001년과 2002년에는 경남발전연구원에서, 2003년에는 경남발전연구원과 경남고고학연구소에서 발굴 조사하였다. 2004년에 경남고고학연구소와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2005년에는 경남고고학연구소와 대성동고분박물관에서, 그리고 2006년에는 대성동고분박물관과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에서 조사하였다. 또 2008년과 2009년에 동서문물연구원에서, 2011년에는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서, 2013년에는 동서문물연구원과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서 발굴 조사하였고, 2014년에 동서문물연구원과 두류문화연구원에서 조사하였다. 2015년 한국문화재보호재단에서 조사하였고, 2015년~2023년에는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2016년에는 동서문물연구원에서 발굴 조사하였다. 2018년에는 한국문화재보호재단과 강산문화연구원에서, 2019년에는 강산문화연구원에서, 그리고 2020년에 한화문물연구원과 가경고고학연구소에서 발굴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 가락국의 생활상을 유추할 수 있는 주거지와 환호(環濠), 토성, 토기 가마터, 야철터, 제사 유구 등의 생활 유적, 그리고 접안 시설과 고상 건물터, 선착장 등의 교역 관련 시설이 복합적으로 확인되었다. 즉, 김해 봉황동 유적가락국 최상위층의 거주 공간이자 교역, 생산, 제사 공간으로 밝혀졌다.

[건립 경위]

김해 봉황동 유적의 남쪽은 고 김해만(古 金海灣)이었기에 김해 지역에서 바다로 나가는 입구라고 할 수 있다. 가락국의 성장 배경이 해양 교역이라는 점에서 보면, 고 김해만에 인접한 낮은 구릉 일대에 거점을 마련한 것으로 판단된다.

[위치]

김해 봉황동 유적김해시 봉황동 253번지에 있다. 김해시 중심가에서 남쪽의 낮은 구릉과 비탈면에 자리한다. 남쪽의 평야 지대는 낙동강(洛東江) 제방으로 형성된 현재의 지형이고, 고대에는 고 김해만으로 불리는 내만성 기수역[민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구역]이었다.

[형태]

면적은 12만 609㎡이며, 봉황 토성의 둘레는 약 1,500m이다. 유적의 중심부이자 가장 높은 곳인 봉황대에는 신과 교감하는 의례 공간이 있다. 봉황대 구릉을 에워싸면서 말각 방형의 봉황 토성이 방어 시설로 기능하였다. 봉황동의 서편인 해반천(海畔川) 변에는 선착장이, 봉황동 구릉의 북쪽과 동쪽 비탈부에는 주거 공간과 생산 공간이, 그리고 봉황동 구릉의 동남쪽 구릉과 비탈부에는 고인돌과 조개더미[패총]가 분포한다.

[현황]

김해 봉황동 유적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2호로 지정되었다. 소유자 및 관리자는 김해시이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 「문화재 지정[등록]번호 삭제 및 문화재명 표기 방식 변경 고시」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는 삭제되었다. 주요 출토 유물로는 모형 토기, 이동식 부뚜막 등 금관가야 시기의 다양한 토기류와 세형동검(細形銅劍) 등의 청동 제품, 그리고 중국 신나라 화폐인 화천과 토우, 붓, 선박 부재, 골각기(骨角器) 등이 있으며,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소장하여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김해 봉황동 유적은 청동기 시대[후기]의 고인돌부터 확인되지만, 기원전 1세기부터 본격적으로 가락국의 거점 취락으로 기능하기 시작하였다. 즉, 주거 시설과 생산 시설, 제사 시설, 방어 시설 등이 밀집되어 확인되었다. 특히, 4세기 대 이후에는 토성도 확인되어 왕성으로 추정된다. 가락국의 왕 묘역인 김해 대성동 고분군(金海 大成洞 古墳群)과 가까이 있고, 유물상도 상호 연결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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