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490
한자 古墳群
영어공식명칭 Ancient Tombs
이칭/별칭 무덤 떼,고분 떼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조성원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는 삼국 시대의 무덤 및 무덤 떼.

[개설]

김해 지역은 삼국 시대 낙동강(洛東江) 하구를 중심으로 자리 잡고 있었던 금관가야(金官伽耶)의 중심지로, 당시 수장층 무덤을 비롯해 다양한 계층의 고분(古墳)이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발굴 조사]

김해 지역 고분군(古墳群)의 발굴은 김해 구산동 고분군(金海 龜山洞 古墳群)을 중심으로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되었으며, 8·15광복 이후 1950년대 중반에 처음 우리 손으로 김해 예안리 고분군(金海 禮安里 古墳群)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에 대한 정식 보고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본격적인 발굴 조사는 1970년대에 들어서야 시작되었다. 1976년~1980년 실시한 김해 예안리 고분군의 발굴 조사에서 수장층 무덤은 확인되지 않았지만, 덧널무덤[목곽묘]과 돌덧널무덤[석곽묘], 돌방무덤[석실묘], 독무덤[옹관묘] 등 다양한 형태의 무덤이 서로 파괴하면서 조성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이 조사는 김해 지역뿐만 아니라 가야의 무덤 형태를 파악하는 데 기초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또한 인골이 양호한 상태로 출토되어, 기록으로만 전하던 편두와 삼국 시대 사람들에 대한 형질 인류학적인 연구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1990년대 초반에는 금관가야 수장층 고분군인 김해 대성동 고분군(金海 大成洞 古墳群)김해 양동리 고분군(金海 良洞里 古墳群)에 대한 발굴 조사가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서는 다량의 철제 무기와 갑옷, 마구 등이 출토되어 4세기 대 가야 지역 최고 계층의 고분군임을 입증하는 동시에, 중국 동북 지역과 일본 열도 등 다양한 계통의 유물도 확인되어 가야가 동북아시아 교역의 중심지였음이 밝혀졌다. 김해 양동리 고분군김해 대성동 고분군에 비해 위계는 낮지만, 일본 열도와의 교류를 보여 주는 다양한 유물이 확인되었다.

1990년대 후반에는 장유와 삼계 일대의 택지 개발과 함께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중소형 규모의 고분군이 발굴 조사되었다. 장유 지역에서는 윗덕정과 능동 고분군 등이, 삼계 지역에서는 김해 화정 고분군(金海 花亭 古墳群)과 두곡 고분군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고분군은 김해 대성동 고분군김해 양동리 고분군과의 위계 관계를 형성하면서 금관가야 세력의 구성과 동향을 잘 보여 주는 자료로 평가된다.

2000년 이후에는 김해 외곽 지역에서 진행된 각종 개발 사업에 동반해 진례·진영·한림 일대에서 고분군들이 조사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죽곡리 고분군(竹谷里 古墳群)퇴래리 고분군(退來里 古墳群)금관가야 외곽 지역의 세력에 대한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5세기 이후 금관가야의 행방을 복원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가지고 있다.

[구조와 특징]

고분은 무덤과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지만, 고고학이나 역사학에서는 고대 국가의 강력한 지배자 무덤을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고고학적으로 볼 때 금관가야의 시작은 3세기 후반 무렵이고, 그 배경에는 본격적인 지배자의 무덤인 덧널무덤[목곽묘]의 출현이 있다. 덧널무덤은 삼한 시대에 등장하지만, 3세기 후반이 되면 금동관, 순장, 대량의 껴묻거리[부장품] 매납 등 이전의 덧널무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유물과 매장 풍습이 확인된다. 또한 새로운 덧널무덤이 이전의 덧널무덤을 파괴하면서 만들어진다. 이와 같은 양상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새로운 덧널무덤이 강력한 지배자의 무덤인 고분이라는 점에서는 의견을 같이한다. 이에 해당하는 가장 대표적인 무덤이 김해 대성동 29호분과 김해 양동리 235호분이다. 이 무덤들은 이전 시기의 매장 풍습도 일부 남아 있지만, 앞서 설명한 새로운 유물과 함께 덧널을 불에 그을린다든가 동물을 함께 묻는 등 새로운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이와 함께 앞서 언급한 다양한 성격의 유물은 무덤의 주인공에게 강력한 권력이 있었음을 잘 보여 준다.

4세기가 되면 덧널무덤의 본격적인 유행과 함께,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부산 복천동 고분군(釜山 福泉洞 古墳群) 등의 금관가야 고분에서 시신을 안치한 주곽(主槨)과 껴묻거리를 위한 공간인 부곽(副槨)이 함께 조성되는 대형의 ‘주부곽식 덧널무덤’이 출현한다. 대형의 주부곽식 덧널무덤은 구릉 능선에 자리 잡고 있어 다른 무덤에 비해 탁월한 입지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시신을 안치하기 위해 당시 화폐의 역할을 하였던 덩이쇠를 바닥에 깔거나 여러 명을 순장하는 등 당시 금관가야 지배층의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다. 대형의 주부곽식 덧널무덤은 주로 김해 대성동 고분군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에, 금관가야 내에서도 대성동 고분군을 조성한 지배자층이 가장 상위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무덤으로 김해 대성동 91호분김해 대성동 88호분, 김해 대성동 2호분, 김해 대성동1호분 등이 있다. 이들 무덤에서는 중국 동북 지역과 일본 열도의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어 금관가야 지배층이 동북아시아 교역의 중심에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후 덧널무덤은 세부적으로 형태적 변화가 있고, 5세기 전반까지 가야 지역에서 주로 유행하게 되지만, 김해와 부산을 제외하면 대형의 덧널무덤은 거의 확인되지 않는다. 이 시기 경주를 중심으로 한 신라에서도 덧널무덤이 유행하였지만, 껴묻거리를 위한 부곽을 주로 시신이 안치된 주곽 내에 마련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

4세기 후반에는 중하위 계층을 중심으로 돌을 이용해서 만든 돌덧널무덤이 등장하고, 5세기부터는 지배자층 무덤에서도 돌덧널무덤이 채용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지배자층에 채용되는 초기의 돌덧널무덤 중 일부는 돌을 쌓아서 벽을 만들었다기보다는 나무 덧널과 무덤 구덩이의 사이를 돌로 채워 넣는 방식이라 전형적인 돌덧널무덤과는 차이가 있다. 돌덧널무덤은 구조적으로도 이전 시기와 큰 차이를 보이는데, 그것은 바로 봉토의 조성이다. 봉토는 시신 안치 공간[매장 주체부]을 마련한 후 그 위에 흙을 높고 크게 쌓아 올린 것으로, 무덤의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봉토는 5세기 중반 이후가 되면 가야와 신라의 대표적인 수장층의 무덤에서는 거의 대부분 확인된다. 그래서 연구자에 따라서는 진정한 의미의 고분은 봉분을 가지게 되는 이때부터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아직 김해 지역에서는 김해 원지리 고분군(金海 元支里 古墳群)을 제외하면 이 시기에 해당하는 봉토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지역에 따라서 차이가 있지만, 돌덧널무덤은 6세기 전반까지 김해 지역은 물론 가야 전역의 대표적인 고분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러나 신라에서는 이 시기에 돌무지덧널무덤[적석 목곽묘]이 주로 이용되고 있어 차이가 있다. 김해 지역의 대표적인 돌덧널무덤으로는 양동리 Ⅳ지구 2호 무덤과 칠산동 35호분, 김해 대성동 73호분, 죽곡리 45호분 등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들 무덤에서는 이전 시기 덧널무덤에서 출토되었던 국제 교류로 유입된 유물은 잘 확인되지 않아, 금관가야의 위상이 이전 같지 않음을 알 수 있다. 6세기 전반에는 무덤에 입구를 두는 형태인 앞트기식 돌덧널무덤[횡구식 석곽묘]이 등장한다. 형태적으로 볼 때 돌덧널무덤과 유사하지만, 짧은 벽 중 한쪽을 입구로 이용하여 시신을 안치나 껴묻거리를 묻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현재까지 이 시기 김해 지역의 수장층 무덤에서는 그다지 자료가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2017년 조사된 김해 원지리 3호분을 보면, 돌덧널무덤과 같이 세장하고 단면 형태가 사다리꼴을 띠고 있다는 점에서 구조적으로 이 시기 창녕 지역의 앞트기식 돌덧널무덤과 유사한 점이 있다. 출토 유물은 이전에 비해 무기나 말갖춤[마구] 등이 줄어 간략화되고 주로 토기가 매납되는 양상인데, 신라와 창녕, 소가야, 대가야 등 인접 지역의 토기가 소량 출토되기도 한다.

6세기 중반 이후에는 무덤 내부로 이어지는 연결 통로[묘도와 연도]와 입구 시설이 갖추어진 돌방무덤이 등장한다. 돌방무덤은 다른 무덤과 달리 연결 통로와 입구 시설을 통해 여러 차례 매장[추가장]이 가능하다는 점이 이전 시대 고분과 가장 큰 차이이다. 돌방무덤은 시신을 안치하는 공간이 방형을 띠고 있다는 점이나 연결 통로의 위치 등에서 당시 신라에서 유행하던 돌방무덤과 유사성이 많다. 또한 출토되는 유물도 대체로 당시 신라에서 유행하던 것과 유사하다. 따라서 신라의 세력 확장에 의해 편입된 김해 지역에서 받아들여서 만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김해 구산동 고분군김해 화정 고분군 등에서 다수 확인되었으며, 김해 유하리 전 왕릉(金海 柳下里 傳 王陵)도 김해 지역의 대표적인 돌방무덤 중 하나이다. 이 중 김해 구산동 고분군김해 수로왕비릉(金海 首露王妃陵) 주변 일대와 김해시 구산동 64번지에 정비 복원되어 있으며, 김해 화정 고분군의 대표적인 돌방무덤은 화정글샘도서관에 이전 복원되어 그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일제 강점기 당시 사진이나 김해 대성동 69호분과 가야의 숲 조성 공사 부지[현 수릉원] 1호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을 통해서 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그 주변 일대에도 돌방무덤이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김해 지역에서 돌방무덤이 확인되고 있지만, 앞서 언급한 것들에 비해 작거나 구조가 단순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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