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578
한자 金海 婆娑石塔
이칭/별칭 진풍탑,파사석탑,바사석탑,김해 바사석탑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탑과 부도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가락로190번길 11[구산동 120-1]
시대 고대/삼국 시대/가야
집필자 김연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88년 - 허황옥 사망
이전 시기/일시 1873년 - 김해 파사석탑 호계변에서 김해 수로왕비릉 앞으로 이전
문화재 지정 일시 1996년 3월 21일연표보기 - 김해 파사석탑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27호 지정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1년 11월 19일 - 김해 파사석탑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 삭제
특기 사항 시기/일시 2024년 5월 17일 - 김해 파사석탑 경상남도 문화재자료에서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로 변경 지정
현 소재지 김해 수로왕비릉 - 경상남도 김해시 가락로190번길 1[구산동 120-1]지도보기
원소재지 호계사 - 경상남도 김해시
성격 석탑
관련 인물 허황옥
재질
크기(높이) 120㎝
소유자 국가유산청
관리자 김해시청
문화재 지정 번호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 구산동 김해 수로왕비릉 경내 파사각에 있는 삼국 시대 석탑.

[개설]

파사석탑(婆娑石塔)은 범어로 ‘바사석탑’이라고 하는데, 진실한 도리, 일체의 지혜가 현증한다는 뜻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기원후 48년 수로왕(首露王)[재위 42~199]의 왕비 허황옥(許黃玉)[?~188]이 아유타국(阿踰陁國)에서 바다의 풍랑을 잠재우기 위해 배에 싣고 온 것으로 전한다. 파사석탑은 13세기에는 호계사(虎溪寺)에 있었고, 1530년(중종 25)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호계 변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1820년(순조 20) 이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김해부내지도(金海府內地圖)」에서는 호계 변의 단독 전각 속에 있다고 하였다. 1873년(고종 10) 김해부사 정현석(鄭顯奭)김해 수로왕비릉(金海 首露王妃陵) 앞으로 이전하여 석회로 보수하였고, 1989년 허명철이 파사석탑을 해체, 실측하였으며, 1993년에 김해 수로왕비릉 앞에 파사각을 세워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최근 김해문화재단[현 김해문화관광재단] 직원 과다솜이 파사석탑을 소재로 한 그림책 『파사 이야기』[데이북, 2020]를 펴냈다.

[건립 경위]

김해 파사석탑의 건립과 관련하여 『삼국유사』 권3 탑상4 금관성 파사석탑(金官城 婆娑石塔)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금관(金官) 호계사의 파사석탑은 옛날 이 읍이 금관국(金官國)일 때, 세조(世祖) 수로왕의 부인인 허황후(許皇后) 황옥(黃玉)이 동한(東漢) 건무(建武) 24년 무신[48]에 서역(西域) 아유타국에서 실어온 것이다. 처음에 공주가 부모의 명을 받들어 바다를 건너 장차 동쪽으로 가려다가 파신(波神)[파도 신]의 노여움을 만나 가지 못하고 돌아왔다. 부왕에게 아뢰니 부왕이 이 탑을 싣고 가라고 하였다. 이내 바다를 건너는데 이로움을 얻어 [금관국] 남쪽 해안에 정박하였는데, 배는 붉은 비단 돛과 붉은 깃발과 주옥으로 아름다움이 있었다. …[중략]… 그런데 이때에 해동에는 절을 지어 불법을 받드는 일이 없었다. 대개 상교(像敎)[불교]가 아직 들어오지 않아서 그 지방의 사람[土人]들이 믿지 않았으므로 본기[가락국기]에도 절을 지었다는 글이 없는 것이다. 제8대 질지왕(銍知王)[재위 451~492] 2년 임인[452]에 이르러 그 땅에 절을 두었다. 또 왕후사(王后寺)를 지었는데[아도(阿道)와 눌지왕(訥祗王)[재위 417~458]의 시대에 해당하며 법흥왕(法興王)[재위 514~540] 대 이전 시기], 지금까지 복을 빌고 있다. 더하여 남쪽의 왜(倭)를 진압하는 것이 본국 본기[가락국기]에 구체적으로 보인다. 탑은 방형으로 4면에 5층인데, 그 조각이 매우 기이하며 돌은 미세한 붉은 반점이 있는데, 그 성질이 부드럽고 좋아서 이 지역의 종류가 아니다. 『본초(本草)』에서 말하는 닭 벼슬의 피를 찍어서 시험한다는 것이 이것이다. 금관국은 또한 가락국(駕洛國)이라고도 하는데, 본기에 구체적으로 기재되어 있다. 찬한다. “탑을 실은 붉은 돛대 깃발도 가벼운데, 신령께 빌어서 거친 바다를 헤치고 왔다. 어찌 황옥만 도와 이 언덕에 왔겠느냐. 천고에 두고 남쪽 왜의 노경(怒鯨)[침략]을 막고자 함이다.”’

[위치]

김해 파사석탑김해시 구산동 120-1번지, 김해 수로왕비릉 경내 파사각 안에 안치되어 있다.

[형태]

높이는 120㎝이다. 지대석 1매와 기단석 1매, 탑 부재 6매가 있으나 전체적으로 훼손과 파괴가 심각하여 탑의 원형은 알 수 없다. 6개의 부재 중 가장 아랫돌은 방형으로 크기는 80㎝×80㎝×18㎝이며, 사방 각 면에 특이한 조각이 새겨져 있다. 밑에서 두 번째 부재는 크기가 58㎝×58㎝×18㎝로, 부재 상단면에는 장식이 없고 동서남북 네 모서리에 특이한 조각이 4개씩 있다. 세 번째 부재는 44㎝×44㎝×18㎝이며, 사방 모서리에 4개의 구멍과 조각이 있다. 네 번째 부재는 32㎝×32㎝×18㎝이며, 상단면은 평평하고 하단면 중앙은 돌출되어 있다. 다섯 번째는 58㎝×58㎝×18㎝인데 파손이 심각하다.

13세기 『삼국유사』 기록을 보면, 4면에 5층으로 되어 있으며 그 조각이 매우 기이하다고 하였다. 고려 시대 김해 지역의 석탑은 주로 통일 신라 시대의 석탑을 계승하였는데, 김해 파사석탑은 전혀 다른 양상을 이루고 있어 13세기에도 특이한 석탑으로 간주된 것으로 보인다.

[현황]

김해 파사석탑은 1996년 3월 21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27호로 지정되었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 「문화재 지정[등록]번호 삭제 및 문화재명 표기 방식 변경 고시」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는 삭제되었다. 2024년 5월 17일 국가유산청의 「국가유산기본법」 시행에 따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에서 경상남도 문화유산자료로 변경되었다. 소유자는 국가유산청이고, 관리자는 김해시청이다. 현재 남아 있는 석탑은 여러 개의 부재가 있는데, 전체적으로 파손과 마멸이 심하다. 2019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조사한 결과 김해 파사석탑의 재질은 가장 아래는 섬록암, 기단부는 화강암, 그 위쪽 6개의 부재는 모두 사암으로 판명되었다. 사암은 상당량의 엽락석을 함유한 것으로, 국내에는 일치하는 산출지가 없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

[의의와 평가]

김해 파사석탑은 현재 많이 훼손되어 원형을 알 수 없으며 조성 시기도 불명확하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기원후 48년이라는 정확한 연대가 언급되어 있고, 이 기록에 따르면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탑 중 가장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되지 않았고, 가락국에 사찰이 건립되었다는 기록이 없어 조성 시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국내에서 나지 않는 사암으로 조성된 김해 파사석탑은 조선 시대에 이미 심한 훼손을 입었으며, 근대에는 어부들이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 파사석탑을 훔쳐 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김해 파사석탑은 바닷길을 통해 가락국에 전해진 탑이라는 점에서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국내에 없는 독특한 형태와 재질의 석탑으로서 그 의의가 있으며, 김해 지역에서 발견된 다른 탑들과 확연히 다르므로 기원과 전개 양상에 대해 계속해서 추적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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