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10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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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初等學校 |
영어공식명칭 | Elementary School |
이칭/별칭 | 초교 |
분야 | 문화·교육/교육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박선영 |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는 초등 보통 교육 기관.
[개설]
초등학교는 기본적인 교육을 실시하기 위한 초등 교육 기관으로, 1948년 「헌법」 제16조 “모든 국민은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규정에 입각하여 1950년부터 의무 교육으로 지정하여 실시하고 있다. 교육 기간은 6년이다. 2023년 1월 기준 경상남도 김해시에는 60개의 초등학교가 있는데, 1,562학급[특수 학급 67학급, 한국어 학급 12학급]에 3만 5150명의 학생이 재학 중이며, 2,050명의 교원이 근무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고려 시대 이후 서당을 시작으로 이루어지던 교육은 근대화의 흐름 속에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현재의 ‘초등학교’는 1895년(고종 32) 7월 19일 「소학교령」의 제정 이후 8월부터 문을 연 장동·매동·정동·계동·주동의 관립 소학교를 시작으로 하고 있다. 김해 지역을 비롯한 여러 지역에 관공립 소학교를 설립해 근대 교육 시행에 노력을 가하였다. 그러나 점차 관공립 소학교가 일제 식민 정책을 수행하는 교육 기관으로 전락하자, 사립 학교 설립 운동이 일어났다. 김해 지역에서도 이에 따라 근대적 사립 초등 교육 기관이 개교하였다. 그중에는 방정환(方定煥)[1899~1931]이 발행한 아동 잡지 『어린이』에 산문 「새벽」을 투고한 박두인(朴斗仁)과 『동아일보』에 짧은 산문 「봄 구경」을 투고한 김홍석(金洪錫)이 다녔던 김해사립합성학교[현 김해합성초등학교]도 있었다.
1945년 8·15광복 이전에 설립되었던 김해 지역의 국민학교는 14개 학교로 동광국민학교[1898년]와 합성국민학교[1909년], 진영대창국민학교[1919년], 장유국민학교[1922년], 생림국민학교[1923년], 대동국민학교[1924년], 진례국민학교[1926년], 이북국민학교[1928년], 주촌국민학교[1931년], 금동국민학교[1932년], 한림국민학교[1942년], 대감국민학교[1944년], 활천국민학교[1945년], 칠산국민학교[1945년]가 있었다. 8·15광복 당시 초등 교육 기관의 명칭은 국민학교였는데, 1941년 「국민학교령」에 의해 초등 교육 기관의 명칭이 국민학교로 통일되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간이 학교와 사설 강습소들이 있었다.
[8·15광복 직후]
1945년 일제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이후 국민학교가 크게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1945년 당시 경상남도 학교 현황을 살펴보면, 1945년에 46개 학교가 새로 생겼고, 1946년에 88개 학교, 1947년에 47개 학교, 1948년에 20개 학교, 1949년에 29개 학교 들이 신설되었다. 이렇게 국민학교가 꾸준히 늘어났던 이유는 1946년 9월부터 단계적으로 의무 교육을 실시하였기 때문이다. 김해 지역에서도 정부의 의무 교육 실시 방침에 따라 국민학교가 신설되었다. 1946년에 진영대흥국민학교와 대중국민학교 등 2개 학교가 신설되었고, 1948년에는 이작국민학교와 용산국민학교, 안명국민학교, 수남국민학교, 김해삼성국민학교 등 5개 학교가, 1949년에는 금산국민학교 1개의 학교가 신설되었다. 이 중에는 이전에 운영되었던 간이 학교와 사설 강습소가 개교하는 경우도 있었다. 1936년 4월 28일에 설립된 안양간이학교는 1948년 4월 26일에 이작국민학교로, 1940년 4월 1일 설립된 응달간이학교는 1948년 3월 25일에 수남국민학교로, 1938년 5월 27일에 인가된 여차간이학교는 1948년에 용산국민학교로 독립 개교하였다. 그리고 1940년 4월 1일에 인가된 안하사설강습소는 1948년 3월 25일에 안하국민학교[현 안명초등학교]로 개교하였다.
[6·25전쟁 시기]
8·15광복의 기쁨이 채 가시기 전 1950년 발발한 6·25전쟁은 전 국토를 전쟁터로 만들었다. 경상남도 지역은 6·25전쟁 중 심한 격전을 벌였던 곳으로, 국민학교만 하더라도 1,200여 교실이 파괴되었다. 김해 지역은 후방이어서 다행히 학교 건물을 비롯해 교육 시설이 파괴되지는 않았으나, 교육 시설들 대부분이 피난민 수용과 군부대의 주둔, 혹은 병원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학교가 교육적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 그중 대성국민학교[현 합성초등학교]는 1950년 7월에 전쟁 이재민 300명을 수용하였고, 공군 1소대와 국군 제9연대, 미군, 미 공병 B중대가 주둔하였는데, 그 과정 중 1951년 1월 2일에 주둔 미군의 실수로 건물에 화재가 나 1952년 6월 6일에 증축하기도 하였다.
[6·25전쟁 이후]
6·25전쟁 이후 국민학교 의무 교육 체제가 정비되기 시작하면서 우리나라의 초등 교육에 큰 변화가 생겼는데, 1954년을 1차 연도로 하여 1959년 6차 연도까지 의무 교육 6개년 계획을 추진하였다. 이때부터 대부분의 아동들이 연령에 맞춰 국민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다만, 학생 수에 비해 국민학교의 수가 적어 학급당 수용 인원이 60명을 초과하는 학교가 많았다. 김해 지역의 경우에도 6·25전쟁 이후 대진국민학교[1956년]와 삼계국민학교[1963년] 2개 학교만 신설된 점을 볼 때, 당시 국민학교의 학급당 인원이 과다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초등 교육 기관의 확충을 위한 노력으로 여러 학교가 신설되었고, 1996년 3월 1일부터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명칭 변경하여 부르게 되었다. 현재 김해시 진영 지역과 장유 신도시에 초등학교들이 여럿 신설되어 있으며, 한편으로는 한림면 등을 비롯한 타 지역의 여러 학교들이 분교가 되거나 폐교가 되었다.
[현황]
2012년 기준 57개 학교 1,510학급[특수 학급 44학급]에 4만 1523명의 학생이 재학하였고 1,994명의 교원이 근무하였으며, 2016년에는 58개 학교 1,484학급[특수 학급 42학급]에 3만 6382명의 학생이 재학하였고 1,957명의 교원이 근무하였다. 2019년에는 58개 학교 1,560학급[특수 학급 55학급]에 3만 6278명의 학생이 재학하였으며, 1,991명의 교원이 근무하였다. 이를 비교하여 보면 학생 수는 감소하고 있는 것에 비해 학급 수와 교원 수는 늘어나는 추세이다. 2023년 기준 학급당 학생 수가 1학년은 20명, 2학년은 22.7명, 3학년은 22.5명, 4학년은 22.9명, 5학년은 23명, 6학년은 23.2명인 것으로 보아, 앞으로 초등학생 재학생 수는 계속적으로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2023년 기준으로 김해시에 소속된 초등학교는 김해 시내 25개 학교[북부동 7개, 삼안동 3개, 불암동 1개, 활천동 3개, 동상동 1개, 부원동 0개, 회현동 1개, 내외동 7개, 칠산서부동 2개]와 장유동 16개 학교, 주촌면 1개 학교, 진례면 2개 학교, 진영읍 6개 학교, 한림면 3개 학교, 생림면 2개 학교, 상동면 2개 학교, 대동면 3개 학교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