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 신안리 토성 터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582
한자 金海 新安里 土城 -
영어공식명칭 Gimhae Sinan-ri Toseong
이칭/별칭 송정리 토성,김해 신안리 토성,송정리 토성 터,김해 송정리 토성 터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터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 신안리 산18|송정리
시대 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
집필자 안성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소재지 김해 신안리 토성 터 -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 신안리 산18|송정리지도보기
성격 토성 터|관방 유적
관리자 김해시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 신안리송정리에 걸쳐 있는 통일 신라 시대 토성 터.

[개설]

김해 신안리 토성(金海 新安里 土城)김해시 진례면 신안리송정리 일원에 있었던 복합성으로, 송정리 토성이라고도 불렸다. 연구자와 조사 기관에 따라 두 토성을 동일한 성곽으로 보기도 하고 별개의 것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변천]

김해 신안리 토성에 관해서는 조선 시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대동지지(大東地志)』,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여지집성(輿地集成)』, 『여지도서(輿地圖書)』에 나와 있는데 모두 비슷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진례성(進禮城) 서쪽 30리[11.78㎞]에 있다. 신라 때에 김인광(金仁匡)진례성제군사(進禮城諸軍事)로 삼았다. 전하기를, 수로왕(首露王)이 아들 하나를 진례성주(進禮城主)로 삼고 왕궁과 태자단, 첨성대를 설치하였다. 지금도 남아 있으며, 사람들이 경성(京城) 안이라 칭한다. 첨성대는 부의 서쪽 30리[11.78㎞]에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기를 가락국에서 태자를 진례성주로 삼아 봉한 곳이라 한다. 토성이 있으며 첨성대의 터가 아직 남아 있다.”

김해 신안리 토성은 통일 신라 시대에 축조된 토성이다. 평탄지를 두르는 내성과 남쪽 구릉을 두르는 외성으로 구성된 복합성인데 이 시기에 축조된 다른 토성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통일 신라 시대 경상남도 지역에서는 강기슭·해안에 닿은 평지와 구릉에 울산 지역에서부터 서쪽으로 반구동 토성-화산리 토성-기장 고읍성-동래 고읍성-동평현 성지-김해 고읍성(金海 古邑城)-회원현 성지-사동리 성지-사천 선진리 토성-남해 성산 토성-순천 홍내동 성지 등을 축조하였는데, 모두 해안 교통의 요지에 해당한다. 이 토성들의 규모는 대략 1㎞~2㎞인데, 김해 신안리 토성 역시 다른 토성과 유사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김해 신안리 토성 역시 김해 고읍성과 같이 치소(治所)의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판단된다.

[위치]

김해 신안리 토성 터김해시 진례면 신안리 산18번지송정리에 걸쳐 있다. 토성은 진례면사무소에서 북쪽으로 약 1㎞ 떨어진 낮은 구릉과 평탄지에 축조되었으며, 진례분지(進禮盆地)를 조망할 수 있는 요지에 해당한다. 현 우리엔텍 및 우리금속 자리 동쪽의 야트막한 구릉을 두르는 내성과, 서쪽과 남쪽의 구릉을 에워싸는 외성으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김해 신안리 토성에 대한 시굴 조사는 김해 복합 스포츠·레저 시설 공사와 관련하여 록인김해스포츠타운에서 진행하였으나, 현재는 조사가 중지된 상태이다. 개발에 앞서 묘 이장이 이루어지고 있다. 현재까지 이루어진 시굴 조사에서는 토성의 성벽을 조사하였는데, 청동기 시대~조선 시대의 다양한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었다. 성벽은 야트막한 구릉 정상부를 평면 ‘U’ 자형으로 두르는 내성과, 내성에서 남서쪽으로 150m 정도 떨어진 부분에서 확인하였다. 기단 석축형 판축 토성으로, 성벽의 너비는 450㎝, 외벽 보축 폭은 250㎝, 내벽 보축부 폭은 600㎝ 정도이다. 성벽 기저부는 원래의 지형을 부분적으로 반반하게 골라 조성하였다. 기단 석렬은 40㎝ 내외의 할석으로 1단~2단을 두었으며, 내벽 기단 석렬은 중복된 부분도 확인되었다. 성벽은 기단 석렬 상부에 사질 점토와 점토를 교대로 다졌다. 토성의 정확한 축조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기존의 연구 성과를 참고한다면 통일신라 시대로 판단된다.

[현황]

김해 신안리 토성은 저구릉의 능선부와 평지를 두르는 토성으로 축조되었던 복합성이다. 공장과 주택, 밭으로 사용되면서 훼손이 심하게 이루어져 현재 토성의 원형을 찾을 수 없다. 유적의 관리자는 김해시이다.

[의의와 평가]

김해 신안리 토성은 문헌 기록을 근거로 가야의 토성으로 보기도 하는데, 시굴 조사 결과 통일 신라 시대의 토성임이 밝혀졌다. 통일 신라 시대의 평지 토성과 달리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진 복합성으로, 진례 지역의 치소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다만 개발 행위로 인해 훼손이 심하게 이루어져 정확한 평면 형태와 축조 수법을 알 수 없으므로, 발굴 조사를 진행하여 정확한 축조 시기와 성격을 밝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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