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9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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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寺刹 |
이칭/별칭 | 절,사원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조원영 |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에 있는 부처의 가르침을 받드는 불교 신행의 장소.
[개설]
김해시에는 은하사·장유암·모은암·해은사·동림사·성조암·백운암·선지사·영구암·흥부암·원명사 등 11개소의 전통사찰이 있다. 사찰에는 보물·지방문화재 등이 소장되어 있다. 사찰의 창건 연기를 보면 대부분 가락국과 관련 있는 곳으로 근대 이전에 창건된 유서 깊은 곳이다. 오늘날에는 통도사 김해포교당 바라밀선원, 여여정사 도심포교당 등 도심지에도 크고 작은 사찰들이 다수 분포하여 불교 신행의 중심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다
[가야~남북국 시대 사찰]
가야 불교에 대한 문헌 기록은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編)의 「가락국기」, 탑상편(塔像編)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 및 「어산불영(魚山佛影)」, 『신증동국여지승람』 김해도호부 고적(古蹟)조 등이 남아 있다. 또한 전승 자료를 기록한 『가락국삼왕사적고(駕洛國三王事蹟考)』 권2 「수로왕개국고(首露王開國考)」, 『김해김씨세보』, 『김해군읍지』「명월사사적비문」, 서림사 대웅전 「취운루중수기(翠雲樓重修記)」 현판 등이 있다. 이 기록에 등장하는 사찰로는 왕후사·진국사(鎭國寺)·흥국사·신국사·은하사·명월사 등이 있다.
왕후사는 『삼국유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 『김해읍지』「명월사사적비문」에 기록이 있는데, 452년 가락국 질지왕이 허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수로왕과 혼인했던 곳에 세웠던 절이다. 즉 수로왕의 8대손인 김질왕(金銍王)이 시조모 허황옥을 위하여 왕후사를 세웠는데, 500여 년 뒤 인근에 장유사가 세워지면서 장유사의 삼강(三綱)이 왕후사가 사원 구역 안에 있다는 이유로 폐사 시키고 곳간과 마구간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가야 시대 창건되었던 왕후사가 고려 초기까지는 존속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흥국사·진국사·신국사는 모두 사찰명에 ‘국(國)’자를 넣어서 길이 국가의 복을 비는 장소로 삼았다고 전한다. 명월사는 중수할 때 허물어진 담장 밑에서 기와 하나가 나왔는데, 그 뒷면에 ‘건강 원년 갑신 3월 남색’ 등의 글자가 있었다고 한다. 건강 원년은 중국 후한 때의 연호로 서기 144년에 해당한다. 기록대로라면 명월사는 수로왕 때 창건된 사찰이 명확하지만, 발견되었다던 명문 기와가 남아 있지 않으므로 그 내용의 진실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다.
그 외에도 김해 지역에는 가야 시대에 창건되었다는 연기설화가 남아 있는 사찰이 많다. 수로왕의 아들 거등왕이 세웠다고 전하는 성조암, 장유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하는 영구암·장유암·백운암, 수로왕비 또는 거등왕이 창건했다고 전하는 모은암, 허왕후가 무사히 가락국에 도착할 수 있도록 도와준 바다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뜻에서 창건했다는 해은사, 장유화상이 나쁜 기운을 누르기 위해 창건했다는 흥부암 등이다. 모두 전통사찰로 지정되어 있다.
삼국 시대와 남북국 시대에는 김해 지역의 사찰과 관련한 문헌 기록이 거의 없어 당시 사찰의 현황을 확인하기는 어렵다. 다만 감로사지·덕산리사지와 진례면 신안리 마애삼존불상이 남아 있는 팔성암지 등의 절터를 통해 당시 김해 지역에 사찰과 불교문화가 활발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 시대 사찰]
고려 시대에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통해 금관성파사석탑을 봉안하고 있었다고 하는 호계사와 왕후사가 세워진 지 500년 후에 장유사가 세워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고려 시대에 조성된 불교 유물을 통해서도 김해 지역에 많은 사찰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불탑으로는 김해시 한림면 안곡리 삼층석탑, 한림면 신천리 흥덕사 경내의 망월석탑, 삼방동 영구암 삼층석탑, 삼방동 동림사 석탑재, 상동면 감로리 감로사지 석탑 부재 등이 남아 있다. 불상은 대체로 바위면에 새겨진 마애불로서 김해시 구산동 마애불, 진영읍 봉화산 마애불, 동상동 연화사로 옮겨진 불암동 마애불, 안동 초선대 마애불, 진례면 신안리 마애삼존불, 장유면 유하리 마애불 등이 있다. 절터로는 일부 발굴 조사가 진행된 감로사지와 덕산리사지, 선지사지가 있다.
감로사는 1237년(고종 24) 해안(海安)이 창건하였으며, 원종대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冲止)가 주지로 주석하면서 사세를 크게 확장시켰다. 감로사는 조선 시대의 기록도 남아 있는데, 1407년(태종 7) 전국의 총 88개 명찰(名刹)을 자복사(資福寺)로 지정할 때 문경 사자사, 하동 양경사 등과 함께 자은종 17개 사원 중의 하나로 편성되었으며, 세종 때는 선교 양종 가운데 선종에 속하였다.
덕산리사지는 불상과 토기, 기와, 지기편 등 출토된 유물을 통해 남북국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 존속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선지사는 1996년 6월 인제대학교 가야문화연구소가 발굴 조사를 실시하면서 출토된 ‘갑자명(甲子銘)’·‘선지사명(仙地寺銘)’ 등의 명문기와를 통해 김해 지역에서 사찰의 명칭이 유물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었으며, 사찰의 창건 시기도 고려 초기로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 시대 사찰]
조선 시대 사찰에 대해서는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속찬지리지』, 『신증동국여지승람』, 『김해부읍지』 등의 기록을 통해 변천 과정을 추정해 볼 수 있다. 15세기 중엽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 『경상도속찬지리지』를 종합하면 김해 지역에는 금강사(金剛社)·장유사(長遊寺)·감로사·구암사(龜巖寺) 등이 있었다. 100여 년이 흐른 16세기 중엽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그 변화가 두드러졌다. 15세기 중엽까지 존치했던 장유사는 폐사된 것으로 보이며, 그 대신에 십선사(十善寺)·청량사(淸涼寺)·이세사(離世寺)·운점사(雲岾寺)·진국사·명월사(明月寺) 등이 추가되었다. 이들 9개 사원은 적어도 16세기까지 남아 있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 후 1786년(정조 10) 김해부에서 편찬한 『김해부읍지』에는 많은 변화를 보인다. 18세기 중엽까지 이전의 9개 사원 중 감로사·임강사·구암사 3개만 남아 있다. 조선 시대의 문헌기록에 보이는 이러한 모습은 김해 지역 불교계에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반영한다.
[일제 강점기 및 현대 사찰]
일제 강점기 김해 지역 주요 사찰로는 은하사·해은사·성조암·장유암·흥부암·백룡암·모은암·백운암·영구암 등이 있었고, 현재까지도 존속하고 있다. 이외에도 동림사·자은암·구천암·관음정사·대법륜사·묘련사·금강사·화엄사·보현사·해광사 및 통도사 김해포교당인 바라밀선원, 여여정사 김해포교당 등 많은 사찰이 지역에서 활발하게 포교 활동을 벌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