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487 |
---|---|
이칭/별칭 | 사지 |
분야 | 종교/불교,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고대/삼국 시대/신라,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고려/고려 전기,고려/고려 후기,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조원영 |
[정의]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서 사찰이 존재하였던 자리.
[개설]
사찰이란 불교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올바로 수립하며 그 진리를 널리 선양하고 구현하는 장소인데, 이러한 사찰이 있던 장소를 절터[寺址]라고 한다. 김해 지역에는 고대부터 불교가 전래되었으므로 수많은 사찰이 창건되어 불교 신행의 공간이 되었다. 문헌 기록만 보아도 가야 시대 왕후사(王后寺)의 창건 이후 흥국사, 진국사, 신국사, 은하사(銀河寺), 명월사 등의 이름이 전하고 있다. 사찰의 이름은 전하지 않지만 그 사찰이 있던 장소에 남아 있는 불교 유물을 통해서도 절터의 존재는 확인되고 있다.
[불탑에 남아 있는 사찰의 흔적]
불탑으로는 김해시 한림면의 김해 안곡리 삼층석탑(金海 安谷里 三層石塔)과 신천리 흥덕사 경내의 김해 망월석탑(金海 望月石塔), 삼방동의 김해 영구암 삼층석탑(金海 靈龜庵 三層石塔), 그리고 삼방동 동림사의 석탑재와 상동면 감노리 감로사 절터의 석탑재 등이 남아 있다. 이 가운데는 원래의 소재지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옮겨진 유물도 있지만, 불탑이 존재하였던 장소는 절터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남아 있는 석탑의 양식으로 볼 때 이 석탑들이 제작된 사찰들도 고려 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애불에 남아 있는 사찰의 흔적]
한편 김해 지역에 남아 있는 바위 면에 새겨진 마애불(磨崖佛)의 존재도 주목할 만하다. 김해 구산동 마애여래좌상(金海 龜山洞 磨崖如來坐像)과 김해 봉화산 마애여래좌상(金海 烽火山 磨崖如來坐像), 동상동 연화사(蓮花寺)로 옮겨진 불암동 마애불, 김해 초선대 마애여래좌상(金海 招仙臺 磨崖如來坐像), 진례면의 신안리 마애삼존불상(新安里 磨崖三尊佛像), 장유면의 김해 유하리 마애불(金海 柳下里 磨崖佛) 등이 전하는데, 마애불 양식을 통해 5개소의 사원 및 절터의 연대를 추론하였다.
본산리 절터는 김해 봉화산 마애여래좌상의 양식을 통해 고려 초기로 추정하였으나, 산포 유물을 통해 남북국 시대 신라 후기까지 소급해 볼 수 있다. 김해 초선대 마애여래좌상이 있는 곳은 안동 절터로 보았는데, 고려 시대 거석불이 존재함으로써 시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장유 유하리 절터의 마애불은 제작 연대를 추정하는 데 어려움이 있으나, 고려 후기로 추정하고 있다. 진례면의 신안리 마애삼존불상이 새겨진 장소는 팔성암 터로 추정하는데, 삼존 불상의 제작 시기는 남북국 시대 신라 후기로 파악하고 있다.
[발굴 조사를 통해 본 사찰의 흔적]
발굴 조사를 통해 사찰의 존재와 존속 시기를 확인하기도 하였다. 현재 절터만 남아 있는 감로사(甘露寺)는 송나라 희종 원년, 즉 고려 고종 24년 승려 해안(海安)에 의해 창건되었다. 13세기 중엽까지는 사찰의 규모와 세력이 크지 않았으나, 원종 대에 이르러 원감(圓鑑) 충지(冲止)가 주지로 활동하면서 번성하게 되었다. 현존하는 유물은 9세기 무렵에 제작된 양산 용화사 석조여래좌상(梁山 龍華寺 石造如來坐像)[보물]과 현재 부산광역시 서구 동아대학교 부민캠퍼스 석당박물관 야외 전시 공간에 전시되어 있는 3층 석탑, 부도, 귀부 등이 있다. 감로사 터에 대한 발굴 조사는 중심 절의 영역에서 동쪽 가장자리에 한정하여 이루어졌다. 따라서 전체 사찰 영역의 범위 및 가람 배치 등의 정확한 양상은 파악하기 힘들다.
김해 덕산리 절터 유적은 남북국 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존속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절터로 경남문화재연구원에서 2002년 2월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유적의 성격을 확인하였다. 이 절터에서는 금동 여래 입상, 금동 보살 입상, 금동 경패, 금동 판불, 소조불 등 불교 미술품 외에 고려 시대 전 시기에 걸친 많은 양의 청자류와 기와가 출토되었다. 사찰의 존속 시기는 출토된 유물의 시기로 보아 남북국 시대부터 조선 시대 15세기 초반으로 추정된다. 김해 덕산리 절터는 지금까지 김해 지역에서 조사된 절터 가운데 가장 많은 양의 불교 유물이 출토된 유적으로, 유물로 보아 대단히 높은 사격(寺格)을 유지하였던 사찰로 볼 수 있다.
발굴 조사를 통하여 원래 사찰의 이름을 확인한 경우도 있다. 1996년 6월 인제대학교 가야문화연구소가 덕천사에 대한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는데, 그 결과 ‘갑자(甲子)’ 명(銘)·‘선지사(仙地寺)’ 명 등의 글자가 새겨진 기와와 ‘귀목문’·‘공작세포문’ 등의 문양 기와 30여 점이 출토되었다. 김해 지역에서 출토 유물을 통해 사찰의 명칭을 확인한 최초의 사례로, 사찰의 창건 시기도 대략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갑자’라고 새겨진 기와에는 11세기~13세기 말까지 성행하였던 문양이 있었는데, 갑자년은 1024년(고려 현종 15) 또는 1085년(고려 선종 2)이라고 추정된다. 발굴 조사를 통해서 원래의 사찰 이름이 확인되었으므로, 덕천사는 2001년 8월 영산전 봉불식 때 선지사로 사찰의 이름을 바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