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5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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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海 詩禮里 古墳群 |
영어공식명칭 | Ancient Tombs in Sirye-ri,Gimhae |
이칭/별칭 | 김해 시례리 유적,김해 복합 레포츠 단지 조성 부지 내 유적,시례리 고분군,청천리 고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고분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 청천리 산102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고대/남북국 시대/통일 신라,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양화영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06년 2월 6일~2006년 9월 30일 - 김해 시례리 고분군 경남문화재연구원에서 지표 조사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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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19년 4월 22일~2019년 8월 12일 - 김해 시례리 고분군 강산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조사 실시 |
소재지 | 김해 시례리 고분군 -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 청천리 산102 |
출토 유물 소장처 | 국립김해박물관 - 경상남도 김해시 가야의길 190[구산동 232] |
성격 | 고분군|취락 유적 |
양식 | 널무덤|독무덤|돌방무덤|움무덤 |
크기(높이,지름) | 166㎝~240㎝[초기 국가 시대 널무덤 길이]|65㎝~109㎝[초기 국가 시대 널무덤 너비]|24㎝~93㎝[초기 국가 시대 널무덤 깊이]|118㎝~137㎝[초기 국가 시대 독무덤 길이]|56㎝~78㎝[초기 국가 시대 독무덤 너비]|24㎝~38㎝[초기 국가 시대 독무덤 깊이]|158㎝~260㎝[조선 시대 움무덤 길이]|61㎝~138㎝[조선 시대 움무덤 너비]|20㎝~124㎝[조선 시대 움무덤 깊이] |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 진례면 청천리에 있는 삼국 시대·통일 신라 시대·조선 시대의 고분군 및 취락 유적.
[위치]
김해 시례리 고분군(金海 詩禮里 古墳群)은 김해시 진례면 청천리 산102번지에 있다. 창원시 의창구 동읍과 접한 진례분지(進禮盆地)의 북서쪽에 자리하는데, 비음산(飛音山)[486m]과 응봉산[284.4m]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의 완만한 비탈에 해당한다. 산지의 낮은 구릉과 연결되는 경사 변환대이며, 지형적으로는 과거 선상지 지형의 단구(段丘)에 해당한다. 유적의 북서쪽에 있는 곤법소류지에서 발원한 소하천이 동쪽의 화포천과 연결되어 그 주변으로 단구와 넓은 충적지를 형성하고 있다. 유적의 남쪽으로는 송정리 유적과 송정리 산월 고분군, 신안리 고분군이 자리하고, 북쪽으로는 죽곡리 고분군(竹谷里 古墳群)과 고모리 유적, 의전리 안평 고분군이 분포하고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김해 복합 레포츠 단지 조성 부지에 대한 지표 조사[경남문화재연구원, 2006년 2월 6일~동년 9월 30일] 및 시굴 조사의 결과에 따라, 유구가 확인된 구역에 대해 2019년 두류문화연구원[1지구]과 삼도문화재연구원[2지구], 강산문화연구원[3지구]이 3개 구역으로 나누어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강산문화재연구원에서는 2019년 4월 22일~동년 8월 12일 사업 예정지 3지구[면적 1만 6518㎡]에 대해 발굴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 초기 국가 시대의 널무덤과 독무덤, 통일 신라 시대의 돌방무덤, 조선 시대의 움무덤 등과 함께 인공 구덩이, 주혈군, 건물터, 집석(集石), 도랑[구], 집자리, 소성(燒成) 등의 생활 유구를 확인하였다.
[형태]
초기 국가 시대의 널무덤 14기, 독무덤 3기 및 인공 구덩이 16기, 주혈군 2개소와 통일 신라 시대의 돌방무덤 15기, 건물터 1기, 적심 1기, 집석 3기, 인공 구덩이 13기, 도랑 2기, 주혈군 5개소, 그리고 조선 시대의 움무덤 8기와 집자리 1기, 소성 유구 1기, 적심 1기, 석렬 1기, 인공 구덩이 8기, 도랑 8기를 확인하였다. 유적의 성격은 진례분지의 서쪽에 위치하는 초기 국가 시대~조선 시대의 취락 유적이다.
초기 국가 시대의 널무덤과 독무덤은 군집을 이루며 분포하였다. 널무덤은 해발 50m~54m에 단독으로 위치하며, 장축 방향은 등고선과 평행하다. 평면 형태는 장방형이며, 규모는 길이가 166㎝~240㎝, 너비가 65㎝~109㎝, 깊이가 24㎝~93㎝이다. 널의 규모는 길이가 121㎝~155㎝이고, 너비가 34㎝~53㎝이다. 널무덤은 판재식 구조이다. 널 상부, 보강토 내부와 상부에 토기류와 철기류를 부장하였는데, 장신구와 같은 위세품은 출토되지 않았다. 부장 양상은 널무덤 단계의 전형적인 조합상을 보여 준다. 독무덤은 해발 53m~55m의 널무덤 주변에 단독으로 조영되었다. 장축 방향은 등고와 평행하며, 규모는 길이가 118㎝~137㎝, 너비가 56㎝~78㎝, 깊이가 24㎝~38㎝이다. 모두 이음식[합구식]이며, 내부에서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널무덤과 독무덤의 조영 시기는 기원전 1세기 전반~기원전 전후기이다. 또 인공 구덩이는 군집을 이루는 형태로 분포하였는데, 평면 형태는 타원형·부정형이다. 규모는 길이가 112㎝~454㎝, 너비가 66㎝~304㎝, 깊이가 7㎝~34㎝이며, 유물은 내부와 바닥에서 아가리[구연부] 조각과 손잡이[파수] 조각이 소량 출토되었다.
통일 신라 시대 돌방무덤은 소군집 형태로 등고선과 평행하게 분포하였는데, 구덩식[수혈식] 10기와 추가장을 한 앞트기식[횡구식] 5기를 확인하였다. 돌방무덤의 입구부는 남쪽 혹은 남동쪽에 설치되어 있는데, 일부에서 폐쇄석 흔적과 무덤길[묘도]을 확인하였다. 내부에 주검받침[시상]은 전면 혹은 일부에 깔았으며, 유물은 토기류와 철기류가 출토되었는데, 철기류의 출토 비중이 낮은 편이다. 무덤의 조성 시기는 신라의 삼국 통일 전후인 7세기 중엽~7세기 후엽이다. 건물터는 정면 2칸, 측면 1칸 구조인 장방형으로, 규모는 길이가 851㎝, 너비가 408㎝이다. 내부에 적심 9개가 남아 있으며, 유물은 기와 조각과 도기 굽다리 조각이 출토되었다. 또 평면 형태가 장방형, 타원형, 부정형으로 다양한 인공 구덩이가 확인되었다. 규모는 길이 100㎝~528㎝, 너비 88㎝~312㎝, 깊이 11㎝~55㎝이며, 내부에서 기와 조각과 토기 조각이 소량 확인되었다. 이들 생활 유구는 돌방무덤 조성 집단과 관련한 통일 신라 시대 취락이 분포하였던 것을 알려 준다.
조선 시대의 움무덤은 해발 58m~63m에서 확인하였는데, 장축 방향은 등고선과 직교한다. 평면 형태는 장방형으로, 규모는 길이가 158㎝~260㎝, 너비가 61㎝~138㎝, 깊이가 20㎝~124㎝이다. 유물은 백자와 분청사기가 출토되었으며, 움무덤은 널을 사용하지 않은 직장묘이다. 또 해발 69.5m에서 집자리를 확인하였는데, 평면 형태는 원형이며, 규모는 길이가 530㎝, 너비가 328㎝, 깊이가 30㎝이다. 내부 시설은 구덩식 화덕 자리[수혈식 노지], 기둥 구멍과 외부로 돌출된 도랑을 갖춘 형태이다. 화덕 자리는 소결된 흔적이 있으며, 기둥 구멍은 집자리 중앙에 위치하는데 하중을 받치기 위한 용도이다. 또 항아리 모양[호상] 형태로 외부에 연결되는 배수구도 확인하였다. 유물은 자기 조각과 철기 조각이 출토되었다. 인공 구덩이는 조선 시대 움무덤 주변에 위치하는데, 평면 형태는 부정형과 타원형, 장방형으로 다양하다. 규모는 길이가 72㎝~484㎝, 너비가 58㎝~308㎝, 깊이가 15㎝~34㎝이다. 유물은 분청사기 조각과 백자 조각이 소량 출토되었다. 이외에도 평면 형태가 ‘一’ 자형인 도랑과 불에 탄 흔적이 보이는 소성 유구, 불규칙하게 배치된 주혈군 등을 확인하였다.
[출토 유물]
토기류와 철기류 202점이 출토되었다. 유물은 널무덤과 돌방무덤의 조영 시기를 알 수 있는 토기류가 주종을 이루는데, 뿔손잡이 항아리[조합 우각형 파수부호]와 주머니호, 검은 간 토기[흑도 장경호], 덧띠 토기[점토대 토기], 뚜껑 달린 굽다리 접시[유개고배], 짧은 굽다리가 달린 완[대부완], 짧은 굽다리 접시 등이 출토되었다.
[현황]
발굴 조사 완료 후 김해 시례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유물은 국가로 귀속되어 국립김해박물관에서 관리 중이다. 고분군 자리에는 현재 ‘김해 복합 스포츠·레저 시설 단지’가 조성 중이다.
[의의와 평가]
김해 시례리 고분군은 초기 국가 시대·통일 신라 시대·조선 시대의 무덤과 생활 유구가 확인된 취락 유적이다. 진례분지 내에서 영위되었던 고대 사회를 일부 확인할 수 기초 자료이며, 금관가야 성립 전 소국의 형성과 교류 관계를 알 수 있는 유적이다. 향후 진례분지 내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자료의 비교 검토를 통해 김해 지역 취락 집단의 성격과 생활상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