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5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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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海 元支里 三·四號墳 |
영어공식명칭 | No.3, 4, The Ancient Tombs at Wonji-ri, Kimhae |
이칭/별칭 | 원지리 3·4호분,원지리 고분 3·4호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고분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 원지리 산2-2 |
시대 | 고대/삼국 시대/가야 |
집필자 | 조성원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17년 11월 - 김해 원지리 3·4호분 경상문화재원구원에서 긴급 발굴 조사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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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18년 5월 3일 - 김해 원지리 고분군 경상남도 기념물 제290호 지정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18년 9월~2019년 1월 - 김해 원지리 3·4호분 가야문물연구원에서 발굴 조사 실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1년 11월 19일 - 김해 원지리 고분군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 삭제 |
소재지 | 김해 원지리 3·4호분 - 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 원지리 산2-2 |
출토 유물 소장처 | 국립김해박물관 - 경상남도 김해시 가야의길 190[구산동 232] |
성격 | 고분군 |
양식 | 앞트기식 돌방무덤|움무덤 |
크기(높이,지름) | 720㎝[김해 원지리 3호분 동-서 봉토 길이]|880㎝[김해 원지리 3호분 남-북 봉토 길이]|330㎝~450㎝[김해 원지리 3호분 봉토 높이]|730㎝[김해 원지리 3호분 매장 시설 길이]|145㎝[김해 원지리 3호분 매장 시설 바닥 너비]|95㎝~100㎝[김해 원지리 3호분 매장 시설 천정 너비]|154㎝~157㎝[김해 원지리 3호분 매장 시설 높이]|약 11.2m[김해 원지리 3호분 호석 기준 동-서 직경]|12.8m[김해 원지리 3호분 호석 기준 남-북 직경]|306㎝[3-1-1호 길이]|98㎝[3-1-1호 너비]|65㎝[3-1-1호 깊이]|305㎝[3-1-2호 길이]|121㎝[3-1-2호 너비]|61㎝[3-1-2호 깊이]|194㎝[3-2호 길이]|110㎝[3-2호 너비]|60㎝[3-2호 깊이]|10.6m[김해 원리지 4호분 동-서 봉토 길이]|9.6m[김해 원리지 4호분 남-북 봉토 길이]|485㎝[김해 원리지 4호분 매장 시설 길이]|329㎝[김해 원리지 4호분 매장 시설 너비]|85㎝[김해 원리지 4호분 매장 시설 깊이] |
소유자 | 이영옥 외|국토교통부 |
관리자 | 김해시청 |
문화재 지정 번호 | 경상남도 기념물 |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 원지리에 있는 삼국 시대 가야의 김해 원지리 고분군 중 3호분과 4호분.
[개설]
김해 원지리 고분군(金海 元支里 古墳群)은 현재까지 총 9기의 봉토가 확인되었다. 그중 김해 원지리 3호분(金海 元支里 三號墳)은 고분군 내에서 가장 큰 봉토를 가진 앞트기식 돌방무덤으로 밝혀졌으며, 김해 원지리 4호분(金海 元支里 四號墳)은 움무덤이나 유물만 부장한 딸린덧널[부곽]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출토 유물이나 무덤 형태로 보아 모두 6세기 대에 조성된, 당시 김해 지역의 유력자 무덤으로 추정된다.
[위치]
김해 원지리 3·4호분(金海 元支里 三·四號墳)은 김해시 주촌면 원지리 산2-2번지, 김해 원지리 고분군에 속해 있다. 김해 원지리 고분군은 김해시의 중앙부에서 서쪽으로 조금 치우친 곳에 자리하며, 경운산(慶雲山)[376.3m]에서 남서쪽으로 뻗어 내려오는 구릉의 능선을 따라 열을 지어 분포하고 있다. 고분군 서쪽으로는 남북 방향으로 원지천이 흐르며 조만강(潮滿江)과 합류하고 있다. 김해 원지리 3호분과 김해 원지리 4호분은 서로 인접해 있으며, 구릉의 능선 말단부에 해당한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김해 원지리 고분군은 1984년 진행된 가야 문화권 유적 정밀 지표 조사를 통해 알려졌으며, 이후 대성동고분박물관에서 지표 조사를 실시해 고분군의 분포 양상이 밝혀졌다. 그중 가장 규모가 큰 김해 원지리 3호분은 도굴로 인해 훼손되어, 2017년 11월 경상문화재원구원에서 긴급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비지정 문화재 학술 발굴 조사로서 매장 시설을 중심으로 조사하였다. 조사 결과 뚜껑돌 7매가 잔존하는 앞트기식 돌방무덤으로, 평면은 좁고 긴 사각형을, 단면은 사다리꼴을 띠고 있는 것이 밝혀졌다. 벽은 깬돌을 이용하여 쌓았으며, 틈 사이에는 석회와 같은 것으로 메웠던 흔적이 있었다. 바닥 중앙에는 시신을 안치하기 위해 깬돌과 강자갈 등으로 공간을 마련하였으나, 도굴로 상당 부분 훼손된 상태였다.
2018년 9월~2019년 1월에는 가야문물연구원에서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김해 원지리 3호분 봉토와 김해 원지리 4호분에 대해 조사하였으며, 이를 통해 김해 원지리 3호분 봉토 규모와 2단으로 구성된 호석을 확인하였다. 또한 봉분 동쪽에서 3-2호 움무덤을, 김해 원지리 3호분과 김해 원지리 4호분 사이에서 3-1-1호와 3-1-2호 등의 돌덧널무덤을 조사하였고, 1호·2호 등의 소형 묘 5기도 추가 조사하였다. 이 중 3-2호는 김해 원지리 3호분에 딸린 무덤으로 추정된다. 김해 원지리 4호분은 움무덤으로 3-1-2호보다 먼저 조성되었으며, 내부는 유물로만 채워져 있었다.
[형태]
김해 원지리 3호분은 동서가 긴 타원형을 띠는 대형 봉토분으로, 매장 시설은 입구를 동쪽에 둔 좁고 긴 앞트기식 돌방무덤이다. 앞트기식 돌방이라는 무덤 형태는 양산 등 낙동강(洛東江) 동쪽의 여러 지역과 유사하며, 특히 좁고 긴 평면 형태나 낮은 시신 안치 공간 등은 창녕 지역의 앞트기식 돌방무덤이나 김해 지역의 돌덧널무덤과 유사성을 보인다.
김해 원지리 3호분의 규모는 봉토 길이가 동-서 720㎝, 남-북 880㎝이고, 봉토 높이는 330㎝~450㎝이다. 매장 시설은 길이가 730㎝, 바닥 너비가 145㎝, 천정 너비가 95㎝~100㎝, 높이가 154㎝~157㎝이며, 호석 기준으로 동-서 직경이 약 11.2m, 남북 직경이 12.8m이다. 3-1-1호의 길이는 306㎝, 너비는 98㎝, 깊이는 65㎝이며, 3-1-2호의 길이는 305㎝, 너비는 121㎝, 깊이는 61㎝이다. 3-2호의 길이는 194㎝, 너비는 110㎝, 깊이는 60㎝이다. 김해 원지리 4호분은 낮은 봉토를 가진 움무덤으로, 부장품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김해 원지리 5호분의 딸린덧널이라는 견해와 제사를 위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김해 원리지 4호분의 규모는 봉토 길이가 동-서 10.6m, 남-북 9.6m이며, 매장 시설은 길이가 485㎝, 너비가 329㎝, 깊이가 85㎝이다.
[출토 유물]
김해 원지리 3호분에서는 매장 시설 내부에서 뚜껑, 굽다리 접시 등 토기류 20점과 화살촉, 대도, 비늘 갑옷 등 철기류 90점이 출토되었고, 입구에서는 뚜껑과 굽다리 접시 등 3점, 화살촉 및 손칼 2점 등이 출토되었다. 도굴로 인해 대부분 원래의 부장 위치를 이탈한 것으로 판단된다. 김해 원지리 4호분에서는 뚜껑 달린 굽다리 접시와 항아리류, 그릇 받침 등 토기류가 126점, 말안장과 발걸이 등 금속류가 14점으로 총 140점이 출토되었다. 이 중 다리 달린 편병에는 다양한 문양이 새겨 있었으며, 다리가 붙은 목 긴 항아리 내에는 안료로 추정되는 철 산화물이 남아 있었다. 이외에 3-1-1호에서 뚜껑 달린 굽다리 접시 등의 토기류와 철기류가 총 12점 나왔고, 3-1-2호에서는 뚜껑 달린 굽다리 접시와 항아리류, 낫 등 총 14점이, 3-2호에서는 다리를 제거한 목 긴 항아리 1점 등이 출토되었다.
[현황]
김해 원지리 3·4호분을 포함하여 김해 원지리 고분군은 2018년 5월 3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290호로 지정되었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 「문화재 지정[등록]번호 삭제 및 문화재명 표기 방식 변경 고시」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는 삭제되었다. 소유자는 이영옥 외 국토교통부이고, 관리자는 김해시청이다. 김해 원지리 3·4호분은 조사 완료 후 복구한 상태이며 철제 펜스를 둘러 보호하고 있는데, 잡목 등으로 인해 접근이 어려운 상태이다. 출토 유물은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소장하여 관리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김해 원지리 3·4호분은 금관가야 멸망 직전의 수장층 무덤으로서,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6세기 전반 금관가야 무덤 양식은 물론 주변 일대와의 관계를 잘 보여 준다. 금관가야 후기의 역사를 복원할 수 있는 중요 자료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