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5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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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海 良洞里 古墳群 |
영어공식명칭 | Ancient Tombs in Yangdong-ri, Kimhae |
이칭/별칭 | 양동리 유적,양동리 고분군,김해 양동리 고분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고분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 양동리 산3 |
시대 | 고대/초기 국가 시대/삼한,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양화영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84년 - 김해 양동리 고분군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 조사 실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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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조사 시기/일시 | 1990년 11월 12일~1996년 2월 29일 - 김해 양동리 고분군 동의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 실시 |
문화재 지정 일시 | 2004년 7월 24일 - 김해 양동리 고분군 사적 제454호 지정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10년 11월 24일~2011년 3월 21일 - 김해 양동리 고분군 국립김해박물관·대성동고분박물관에서 학술 발굴 조사 실시 |
발굴 조사 시기/일시 | 2019년 7월 12일~2020년 2월 26일 - 김해 양동리 고분군 한화문물연구원에서 학술 발굴 조사 실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21년 11월 19일 - 김해 양동리 고분군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 삭제 |
소재지 | 김해 양동리 고분군 - 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 양동리 산3 |
출토 유물 소장처 | 국립김해박물관 - 경상남도 김해시 가야의길 190[구산동 232] |
출토 유물 소장처 | 한화문물연구원 -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 여래로20번길 10[여래리 700-189] |
성격 | 고분군 |
양식 | 널무덤|덧널무덤|돌덧널무덤|독무덤|돌방무덤|움무덤 |
소유자 | 김해시 |
관리자 | 김해시 |
문화재 지정 번호 | 사적 |
[정의]
경상남도 김해시 주촌면 양동리에 있는 초기 국가 시대~삼국 시대 고분군.
[개설]
김해 양동리 고분군(金海 良洞里 古墳群)은 초기 국가 시대~삼국 시대의 널무덤[목관묘]과 덧널무덤[목곽묘], 돌덧널무덤[석곽묘], 독무덤[옹관묘] 등 다양한 형태를 가진 고분군으로, 김해 지역 정치체의 형성과 성장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또한 김해 양동리 고분군 조영 집단의 생활 유적인 김해 유하패총(金海 柳下貝塚)이 남동쪽에 연접하고 있어, 고분군과 패총의 관계를 통해 금관가야 최상위 집단의 무덤과 생활상, 성격을 확인할 수 있다. 김해 양동리 고분군은 1984년 이후 발굴 조사가 지속적으로 실시되어 유적의 성격이 보다 명확해졌다.
[위치]
김해 양동리 고분군은 김해시 주촌면 양동리 산3번지 가곡마을 뒤편의 야산에 있다. 유적의 서쪽과 북쪽은 매봉산[338.5m]과 주지봉[273.4m]이 에워싸고 있고, 남쪽으로는 조만강(潮滿江)의 지류인 소하천이 관류하며, 주변으로 충적지가 발달해 있다. 남동쪽으로는 후포 고분군과 마주 보고 있다.
[발굴 조사 경위 및 결과]
1984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 조사를 실시하여 널무덤 4기와 덧널무덤 16기, 독무덤 3기, 기타 8기를 확인하였다. 이후 1990년 11월 12일~1996년 2월 29일 동의대학교 박물관에서 다섯 차례 발굴 조사[김해시 주촌면 양동리 산6-2번지와 양동리 산4번지 일원의 경계 지점에 대한 긴급 조사 포함]를 진행하여 널무덤 8기와 덧널무덤 425기, 돌덧널무덤 31기, 독무덤 73기, 기타 10기 등 547기를 확인하였으며, 이를 통해 무덤의 변천 양상을 알 수 있었다. 또한 2010년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의 사적 정비 계획 수립을 위한 학술 발굴 조사로서, 동년 11월 24일~2011년 3월 21일 국립김해박물관과 대성동고분박물관이 학술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결과 널무덤 25기와 덧널무덤 1기, 돌덧널무덤 1기, 독무덤 8기, 돌방무덤 1기, 움무덤 6기, 그리고 시대 미상의 인공 구덩이[수혈] 2기를 확인하여 김해 양동리 고분군의 조영 시기 하한을 7세기 대로 조정하였다. 이후 가야사 복원과 김해 양동리 고분군 활용 방안을 위한 조사로서 한화문물연구원이 2019년 7월 12일~2020년 2월 26일 학술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널무덤 1기와 덧널무덤 39기, 돌덧널무덤 11기, 돌널무덤 1기, 그리고 독무덤 5기와 인공 구덩이 7기, 역사 시대 무덤 4기를 확인하여 김해 양동리 고분군을 조영하였던 생활 유구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형태]
고분군의 면적은 5만 1826㎡이다. 유구는 중복·밀집된 상태로 확인되어 무덤의 선후 관계가 비교적 분명하게 드러났는데, 널무덤→덧널무덤→돌덧널무덤→돌방무덤의 단계로 변화·발전되어 갔다. 널무덤은 38기를 확인하였는데, 유구의 형태나 출토 유물에 따라 6시기로 세분된다. Ⅰ기는 평면 형태가 장방형이며, 장축은 등고와 나란한 남-북향이다. 70호분이 대표적이다. Ⅱ기는 평면 형태가 장방형인 전형적인 널무덤이 등장하는 시기로, 유구의 깊이가 깊어지고 폭도 넓어지는 경향이 있다. 장축은 등고선과 직교하며, 유물은 토기와 철기, 청동기, 장신구를 부장하였는데 52호분이 대표적이다. Ⅲ기는 유구의 구조나 부장 유물은 Ⅱ기와 비슷하지만, 철기류는 무기류가 부장되었고, 청동기인 본뜬거울[방제경]과 한국식 동검[세형동검], 청동제 팔찌가 출토되었다. 17호분·427호분이 대표적이다. Ⅳ기도 유구의 형태나 부장 유물은 전 시기와 동일하지만, 유물의 부장량이 증가하고 요갱이 확인되었다. 또 청동제 부속구가 확인되었으며, 청동기 본뜬거울에도 청동기가 부착되었는데, 55호분·99호분·151호분이 대표적이다. Ⅴ기는 7호분이 대표적이며, 유구의 형태는 동일하나 규모가 약간 커지는 경향이 있다. Ⅴ시기는 이른 시기의 덧널무덤과 공존하는데, 부장 유물도 과도기적 양상을 보이는 특징이 있다. 김해 양동리 고분군의 널무덤 조영 시기는 기원전 2세기 말~2세기 중엽에 해당한다.
덧널무덤은 481기를 확인하였는데 고분군 중에서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다. 무덤의 형태나 출토 유물에 따라 6시기로 세분된다. 초기 단계인 Ⅰ기는 대형의 덧널이 축조되어 초기 가야 고분으로 규정할 수 있다. 초기 덧널무덤은 162호분이 유일한 형태이다. 162호분의 평면 형태는 장방형이며, 처음으로 대형 덧널이 등장하는 시기에 조영되었다. 유물은 와질 토기 1점이 출토되었으며, 판 모양 쇠 도끼[판상 철부] 10매씩을 묶어 널의 네 모서리를 받쳐 널받침[관대] 역할을 하게 하였다. 이외에 철기류도 다량으로 부장하였으며, 청동기인 청동 거울[동경]과 수정제의 목걸이도 부장되었다. 또 덧널 내에 칠기흔이나 빈 공간이 많은 점을 확인하였는데, 이는 칠기나 목기 용기를 부장하였을 가능성이 많음을 알려 준다.
Ⅱ기는 덧널무덤이 대형화되지만 후대 유구와 중복되어 잔존 상태가 양호하지 않은 시기로, 200호분·212호분·309호분이 대표적이다. Ⅱ기에도 유물은 전 시기와 동일하며, 새롭게 두드림무늬[타날문] 짧은 목 항아리와 대도, 소용돌이 장식 철기와 광형 투겁창[광형 동모], 검파 금구(劍把 金具)의 청동기가 부장되었는데, 널무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Ⅲ기는 덧널의 규모가 최대치로 축조되었으며, 장의 습속(葬儀 習俗)으로 덧널을 불태우는 특수한 장의 행위(葬儀 行爲)가 등장하고 덧널의 바닥에 판 모양 쇠 도끼를 깔았다. 전 시기에 비해 토기가 다량 부장되었는데, 양 장벽과 한 단벽에 부장하였다. 이 시기에는 토기류와 둥근 고리자루칼[환두대도]과 쇠 화살촉의 철기류, 북방계 청동 솥[동정(銅鼎)과 동복(銅鍑)]의 청동기가 부장되었는데, 235호분·280호분·171호분·322호분이 대표적이다.
Ⅳ기는 전 시기와 유구 형태나 유물 부장 양상이 유사하나, 덧널의 규모와 폭이 축조되어 평면 형태가 세장방형으로 변화하였다. 15호분·58호분·67호분·81호분·85호분 덧널이 대표적이다. 유물은 경질 토기와 화로 모양 토기 수가 증가하였고, 손잡이 달린[파수부] 화로 모양 토기가 새롭게 등장하였다. 철기는 긴 칼[장검]과 쇠 화살촉이 부장되었다. Ⅴ기는 평면 형태가 세장방형으로, 김해 양동리 고분군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데, 19호분·24호분·37호분·74호분·90호분·167호분이 대표적이다. 유물은 한쪽 단벽 또는 양 단벽에 토기를 부장하였고, 가운데에 철기를 부장하였다. 토기류는 경질 토기가 중심이 되어 원통 모양 그릇 받침[통형 기대] 등이 새로이 부장되었으며, 철기류는 투구[종장판 갑주]와 덧널의 결구를 위한 곽정(槨釘), 꺽쇠가 출토되었다. 또 의기성 유물인 미늘쇠[유자 이기]가 처음으로 부장되었으며, 가는고리 귀걸이[세환 이식]도 부장되었다.
Ⅵ기는 9호분·78호분·107호분·441호분·443호분 덧널무덤이 대표적이다. 평면 형태는 세장방형이나 처음으로 딸린덧널[부곽]이 축조되는 동혈 주부곽식(同穴 主副槨式)의 덧널무덤이 등장한다. 바닥에서는 주검받침[시상] 또는 널받침이 확인되었다. 딸린덧널이 없는 단독의 덧널무덤은 유물 부장 양상이 전 시기와 동일하지만, 주부곽식의 경우 으뜸 덧널[주곽]에는 소형 토기와 착장 유물을, 딸린덧널에는 대형 토기류를 부장하였다. 또 철기류는 목 가리개[경갑]와 비늘 갑옷[찰갑]이, 말갖춤[마구]은 재갈[비(㘘)]과 발걸이[등자]가 새롭게 부장되었으며, 청동기 의기인 굴대 끝에 씌우는 부속품[통형 동기]이 확인되었다. 덧널무덤의 조영 시기는 2세기 후엽~5세기 전엽이다.
돌덧널무덤은 43기를 확인하였는데, 78호분·93호분·304호분·321호분이 대표적이다. 돌덧널의 이른 시기는 평면 형태가 대형의 장방형으로, 구덩식[수혈식]으로 축조하였다. 늦은 시기는 평면 형태가 세장방형으로 변경되었다. 바닥에는 주검받침 또는 널받침을 마련하였고 나무 뚜껑[목개]을 사용하였다. 일부는 덧널 형태의 딸린덧널을 축조하였다. 유물은 덧널무덤의 마지막 단계와 동일한데, 이 시기에 유사 돌무지덧널무덤[적석 목곽묘]도 9기 축조되었다. 단독으로 위치한 돌덧널무덤은 양 장벽에 토기, 가운데에 철기를 부장하였다. 돌덧널무덤은 4세기 말에 처음 축조되어 5세기 대에 성행하였다.
독무덤은 89기를 확인하였는데 형태는 대부분 이음[합구식] 독무덤이다. 홑[단옹식] 독무덤도 7기 확인하였는데 소형이다. 독무덤은 널무덤 단계부터 돌덧널무덤 단계까지 모든 시기에 지속적으로 확인되었다. 돌방무덤은 1기를 확인하였는데, 널방[현실]만 남아 있다. 반지상식 구조이며, 유물은 짧은 굽다리 접시[단각 고배]가 출토되었다. 돌방무덤의 조영 시기는 7세기 대이다. 발굴 조사된 자료를 통해 김해 양동리 고분군의 조영 시기는 상한이 기원전 2세기 말, 하한은 기원후 7세기 대로 추정되며, 특히 기원후 1세기부터 5세기까지 단절 없이 연속적으로 조성된 양상을 보여 준다.
[출토 유물]
토기류 2,497점과 철기류 5,742점, 청동기류 101점, 장신구류 207점, 기타 44점 등 8,593점이 출토되었다. 유물의 기종은 토기류와 농공구류, 무기류, 의기성 철기류, 그리고 장신구와 청동 거울, 청동 솥, 검파 금구 등의 의기성 청동기류 등으로, 초기 국가 시대~삼국 시대 무덤의 변천과 시기를 알 수 있는 다양한 기종과 기형, 재질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김해 양동리 고분군에서는 중국계 유물과 일본계 유물이 많이 출토되어 당시 교류나 국제적 위상도 짐작할 수 있다.
[현황]
김해 양동리 고분군은 2004년 7월 24일 사적 제454호로 지정되었다. 소유자 및 관리자는 김해시이다.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고시 제2021-141호 「문화재 지정[등록]번호 삭제 및 문화재명 표기 방식 변경 고시」에 따라 문화재 지정 번호는 삭제되었다. 발굴 조사된 구역은 잔디를 심어 원형 보존하고 있다. 고분군 외곽에 철제 울타리를 둘러 놓았으며, 도로변에 문화재 알림판을 설치해 놓았다. 현재 동의대학교 박물관의 발굴 조사 출토 유물과 국립김해박물관·대성동고분박물관의 발굴 조사 출토 유물은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고, 2020년 한화문물연구원에서 발굴 조사한 유물은 2023년 8월 기준 한화문물연구원에서 임시 보관 중이다.
[의의와 평가]
김해 양동리 고분군은 묘제나 유물의 변천 양상이 잘 나타나 있어 가야 묘제의 변천 과정과 시기별 성장 과정, 사회적 성격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낙동강 하류역의 가야 사회 성장과 국가적 성격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지표가 된다. 유적에서 출토된 다양한 철기와 외래계 유물을 통해 당시 김해 양동리 고분군 문화가 해상 무역과 교역 중심의 국제성을 띤 선진 문화임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차후 금관가야의 중심인 김해 대성동 고분군(金海 大成洞 古墳群)과의 비교 검토를 통해 정치적 성장과 문화, 생활상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