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석문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1362
한자 金石文
이칭/별칭 금석 문자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안순형

[정의]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 있는 돌과 금속류에 기록된 문자.

[개설]

김해시 금석문(金石文)과 관련해서는 1999년 김해문화원에서 발간한 『김해금석문총람』에 비문(碑文) 총 202개가 수록되어 있다. 조사 범위는 예전 김해시에 포함되었던 현 부산광역시 강서구 및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일부 지역도 포함되어 있다. 근래에 조사된 것 4개를 추가하면 현재 김해 지역에는 총 206개의 금석문이 있는데, 내용적으로는 유교와 관련한 것과 불교와 관련한 것으로 구분된다. 읍면동별로 분포 현황을 살펴보면, 김해시 동상동이 8개, 회현동이 13개, 부원동이 3개, 내외동이 16개, 북부동이 5개, 칠산서부동이 8개, 활천동이 3개, 삼안동이 7개, 불암동이 5개, 진영읍이 14개, 장유동이 33개, 주촌면이 13개, 진례면이 19개, 한림면이 11개, 생림면이 12개, 상동면이 7개, 대동면이 7개, 부산광역시 강서구가 20개, 창원시 진해구가 3개이다. 김해시 장유동이 총 33개로 가장 많다.

제작 시기별로는 16세기가 1개, 17세기가 11개, 18세기가 11개, 19세기가 38개, 20세기 전반이 70개, 20세기 후반이 63개, 21세기가 1개, 시대 미상이 10개이다. 20세기에 제작된 것이 64.6%로 압도적으로 많다. 시기를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것은 1537년(중종 32) 새겨진 ‘서상동 지석묘 각석’이고, 여성과 관련한 최초의 것은 1687년(숙종 13) 주촌면 원지리에 세워진 ‘숙부인 청주이씨지묘’의 비석이다. 형태별로 볼 때는 묘비가 64개, 사적비와 기념비가 59개, 정려비가 39개, 송덕비가 34개, 마애 각석이 3개, 왕릉비가 2개, 시비가 1개, 미상이 4개이다. 묘비가 31.1%로 가장 많고, 가락국의 왕도(王都)답게 왕릉비가 2개 있다.

[가락국 관련 금석문]

김해 지역은 가락국의 고도(古都)이므로 시조 수로왕(首露王)과 왕비인 허황옥(許黃玉)과 관련한 비석이 많다. 김해 시내에는 1647년(인조 25) 경상도관찰사였던 허적(許積)이 수로왕허왕후의 덕을 칭송하고 왕릉의 수축 경위를 적어 세운 ‘가락국 태조 왕릉 중건 신도비명’을 비롯하여, 1680년(숙종 6) 허재(許梓)가 봉황동가락국 왕궁터를 정비하고 세운 ‘가락국 시조 왕궁허비’, 1884년(고종 21)에 숭선전(崇善殿)의 사적을 기록하여 세운 ‘가락국 태조릉 숭선전비’, 1908년(순종 2) 6가야의 왕이 구지봉(龜旨峯)에서 태어났음을 기념하며 세운 ‘대가락국 태조왕 탄강지지비’ 등이 있다.

[임진왜란 관련 금석문]

김해 지역은 임진왜란 격전지 중의 한 곳으로 사충신을 포함한 의병들이 결사 항전(決死 抗戰)한 곳이다. 사충신을 기리는 다양한 기념비가 건립되었는데, 1736년(영조 12) 송빈(宋賓)의 순절을 기리며 김해 서상동 지석묘(金海 西上洞 支石墓)에 ‘송공 순절암’이라 새긴 각석, 1871년(고종 8) 김해부사 정현석(鄭顯奭)이 사충신을 추모하며 건립한 ‘사충단비’, 1882년(고종 19) 진례면 신안마을에 세워진 ‘표충사 매안단비’, 1896년(고종 33)에 세워진 ‘삼충대비’, 1903년(고종 40)에 김득기(金得器)를 기리며 세워진 ‘증참판 의성김공 신도비’ 등이 대표적이다.

[분성산 관련 금석문]

분성산(盆城山)에는 왜구의 침입에 방비하기 위해 일찍부터 성을 쌓았다. 고려 후기 박위(朴葳)가 분성산성을 수축하였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조선 후기 김해부사 정현석이 세웠던 ‘정국군 박공 축성사적비’가 있다. 또한 흥선대원군의 명을 받아 새긴 ‘만장대’ 각석 및 ‘흥선대원군 만세불망비’가 있고, 1874년(고종 11)에 세워진 ‘부사 통정대부 정후현석 영세불망비’도 있다.

[송덕비 관련 금석문]

김해부사 송덕비가 22기, 경상도관찰사 송덕비가 4기 있다. 김해부사 송덕비는 박경지(朴敬祉), 정현석, 황호(黃鎬)의 비가 2개씩 세워져 있으므로 19명의 것이 있다. 17세기에 건립된 비가 5기이고, 18세기의 비가 6기, 19세기의 비가 9기, 20세기의 비가 1기, 연도 미상의 비가 1기이다. 송덕비 중 김해 수로왕비릉(金海 首露王妃陵) 도로변에 모아 두었던 14기는 왕릉을 정비하면서 1990년 10월 외동 나비공원[현 한글문화공원]으로 옮겨 놓았다. 송덕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651년(효종 2) 진영읍에 건립된 ‘부사 가선대부 박공경지 청엄선정비’이다. 1724년(경종 4)에 건립된 박동상의 비는 철비(鐵碑)라서 주목된다. 또한 생림면에 1888년(고종 25)의 ‘부사 조후휘병갑 영세불망비’가 있는 것으로 보아 송덕비와 선정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 관련 금석문]

일제 식민지 수탈과 관련한 것으로는 1912년 완공된 ‘촌정농장 주천갑문’의 준공 표지석, 수리 조합과 관련하여 1916년에 세워진 ‘김해 수리공사 기념비’와 1917년의 ‘대저 수리공사 기념비’가 있다. 한편 8·15광복 이후에 건립되었지만 3·1만세운동과 관련한 최초의 것으로는, 장유3·1만세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967년 장유면 주도로 내덕동에 세운 김해 3·1운동 기념탑이 있다. 이 밖에 민족 운동과 근대화에 기여한 인물들을 기리는 것으로는 1967년 회현동 합성초등학교 교정에 건립된 ‘허발·박석권선생 공적기념비’가 있다.

[불교 관련 금석문]

1915년에 건립된 것으로 장유화상(長遊和尙)가락국에 불교를 전하였다는 전설이 담긴 ‘가락국사 장유화상 기적비’와 1935년에 세워진 장유암(長遊庵) 중수와 관련한 ‘가락 고도 장유암 중수비’가 있다.

[특징]

김해 금석문의 특징은 첫 번째, 가락국의 왕도이므로 가락국과 관련한 것이 많고, 또한 상당수의 비석은 가락국의 후손들이 제작 및 건립에 참여하였다는 점이다. 두 번째 특징은 임진왜란김해성전투(金海城戰鬪)에서 순국한 사충신과 관련한 것이 많다는 점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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