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4002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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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 |
영어공식명칭 | History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
지역 | 경상남도 김해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광철 |
[정의]
선사 시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경상남도 김해시의 역사.
[개설]
김해 지역 사회는 청동기 시대에 대규모 취락이 형성된 후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가락국(駕洛國)으로 성장하여 가야 제국의 중심 국가가 되었다. 신라에 병합된 후 금관군(金官郡), 금관소경(金官小京), 김해소경(金海小京)으로 자리잡았다가 고려 시대에는 금주(金州)로 승격하여 7개의 속읍(屬邑)을 거느린 지역 거점 도시로 성장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가 되어 면리제로 행정이 운영되었는데, 조선 후기 김해도호부에는 20개 면에 205개 정도 동리가 분포되어 있었다. 1895년(고종 32) 23부제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김해군(金海郡)이 된 이래 일제 강점기를 거쳐 1970년대까지 이 읍격을 유지하였다. 1981년 7월 1일자로 김해읍이 김해시로 승격함으로써 김해시와 김해군으로 나누어졌다가, 1995년 5월 통합 김해시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선사 시대]
김해 지역의 선사 시대는 신석기 시대부터 초기 철기 시대 이전까지로 설정할 수 있다. 신석기 시대 유적은 대부분 강가나 바닷가, 낮은 구릉에 입지하였는데, 김해의 신석기 시대 유적도 하나같이 모두 바닷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수가리 조개더미 유적, 범방 조개더미 유적 등이 대표적인 유적이다. 이들 유적에서는 많은 조개류와 함께 돌도끼, 돌칼, 타제 석기, 갈돌, 갈판, 숫돌, 토우, 빗살무늬 토기, 낚시 바늘 등이 출토되었다. 신석기인들은 수렵과 어로로 경제 생활을 영위하였고 본격적인 농경은 아직 몰랐던 사람들로서 한 곳에서 오랫동안 정착 생활은 어려웠던 것 같다.
김해 지역의 청동기 문화 유적으로 현재까지 알려진 유적은 진영읍 여래리 유적 등 53개소에 이르며, 집자리[住居址], 고인돌 등의 무덤, 환호(環濠), 구덩이[竪穴] 등 다양한 유구가 조사되었다. 청동기 시대의 유적과 출토 유물을 통해 김해 지역에도 농경이 확산되고 안정적인 정주 생활을 하면서 취락이 형성되고 있었던 청동기 시대의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환호와 고인돌의 축조에서 공동 노동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점차 계층 분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무덤에서 돌화살촉[石鏃], 간돌검[磨製石劍] 등의 무기류가 많이 출토된다는 점에서 대규모 전쟁은 아니라 하더라도 심각한 사회적 갈등이 표출되고 있었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사회적 갈등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공동체 수장(首長)의 지위는 더욱 강화되었다.
[가야 시대]
김해 지역에서는 기원전 2세기 경에 초기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국가가 형성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것이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변진조에 실려 있는 변한 12국 가운데 구야국(狗耶國)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등장하였다. 『가락국기(駕洛國記)』의 ‘9간(干)’으로 상징된 소국(小國)이 형성된 가운데, 기원후 42년에 수로왕(首露王)이 대표하던 소국을 중심으로 주변 몇 개의 소국을 병합하여 가락국(駕洛國)이 성립되었다.
가락국은 철 생산과 해상 교역을 바탕으로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 가락국에서 생산되는 철은 한(韓)과 예(濊), 왜(倭), 낙랑군과 대방군에 수출되었고, 화폐로도 사용되어 교역의 수단이 되고 있었다. 가락국은 신라, 백제와 경쟁하면서 성장하였다.
가락국은 칠포국(柒浦國)[칠원]·고사포국(古史浦國)[고성]·사물국(史勿國)[사천] 등 포상팔국(浦上八國)의 도전을 받게 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고구려·백제 사이의 패권 다툼에서 백제가 대패하고 광개토왕의 고구려 5만 군사가 신라를 도와 낙동강 하류 지역까지 진출하여 가야를 토벌함으로써 큰 타격을 입었다. 이 후 세력의 약화를 면치 못하다가 532년(법흥왕 19) 신라에 투항하고 말았다.
[통일 신라 시대]
신라에 병합되어 ‘금관군’, ‘가야군’으로 편제되었던 김해 지역 사회는 680년(문무왕 20) 5월 ‘금관소경’으로 승격되었으며, 757년(경덕왕 16) 지방 제도 개편 때에 ‘김해소경’으로 개칭되었다. 소경에는 군현이 설치되지 않고, 곧바로 소경-촌으로 연결되는 구조였기 때문에 금관소경에도 수많은 자연촌이 분포되어 있었다. 이들 자연촌 가운데는 촌 행정의 중심지로서 지역촌 또는 행정촌이 지정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 통일기 김해 지역에는 금관경의 소경성이기도 한 분산성(盆山城)을 배경으로 하여 소경의 중심 읍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 곳에는 소경의 관아가 자리잡았고, 중앙에서 파견된 소경의 장관인 사신(仕臣)과 법당주(法幢主) 등 몇몇 군관들이 여기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소경의 촌주는 3~4개 촌을 관할하였다고 보는데, 주로 사신을 보좌하여 촌락 행정을 담당하고, 때에 따라 군사적 업무도 수행하였다.
신라 말 농민 항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는 가운데 각 지역에서 호족 세력이 등장하고 있었는데, 김해 지역에서는 소충자(蘇忠子)·소율희(蘇律熙) 형제와 김인광(金仁匡) 등이 호족으로 성장하여 지역을 지배하였다. 이 시기 김해 지역의 읍격은 ‘김해소경’이 아니라 ‘김해부’였다. 신라 중앙정부는 지역에서 호족 세력이 등장하자, 현실을 인정하고 김해소경을 김해부로 개편하여 지역 호족이 실질적으로 지역을 관할하게 하면서 통제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고려 시대]
후삼국을 통합한 후 고려에서는 940년(태조 23) 군현 개편을 단행하면서 김해부가 되었고, 뒤에 임해현(臨海縣)으로 강등되었다가 다시 임해군으로 승격되었다. 971년(광종 22)에 김해부(金海府)로 개편하였고, 995년(성종 14) 10도제 체제로 지방제도를 개편하면서 금주안동도호부(金州安東都護府)로 승격하였다. 1012년(현종 3)에 금주방어사(金州防禦使)의 읍격으로 강등되었다가, 1018년(현종 9) 전국적인 군현개편에서 금주는 7개의 속읍을 거느린 주읍으로 성장하였다. 금주에는 이들 속읍과 함께 부곡 영역으로서 4곳의 향(鄕)과 3곳의 부곡(部曲)이 있었다.
고려 시대 김해에는 지방관으로 수령인 방어사(防禦使), 방어부사(防禦副使)와 함께, 판관(判官), 사록(司錄), 장서기(掌書記) 등이 파견되어 있었다. 판관과 사록, 장서기는 이른바 속관(屬官)으로서 수령을 보좌하는 한편 행정 업무를 담당하였다. 그 아래에 지방관을 도와 행정 실무를 처리하는 향리층이 있었다. 금주의 향리는 김(金)·허(許)·배(裵)·손(孫)·송(宋)·유(庾)씨 등 토성층이었다. 금주의 향리 액수가 얼마였는지 알 수 없지만, 인구 수를 300정 이상으로 추정하면 51명 정도의 향리가 활동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김해의 지방관과 향리층은 이 곳 치소(治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치소에는 치소성이 축조되었고, 행정 관청인 관아, 객사가 기본적으로 배치되었으며, 향리의 자치조직인 읍사(邑司)가 자리잡고 있었다.
12세기 말 이후 고려 사회는 계속되는 농민 항쟁, 장기간의 고려-몽골 전쟁, 삼별초 항쟁,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 왜구의 침입 등 내외적 충격을 경험하면서 사회 변화를 가져오고 있었다. 김해 지역에서는 1200년(신종 3) 8월, 일반 주민이 토호세력 향리를 공격하는 이른바 ‘잡족인의 봉기’가 발생하여 지역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고려-몽골 전쟁에 이어 벌어지는 삼별초 항쟁에서 김해 지역도 삼별초 공격의 대상 지역이 되었다. 원의 내정 간섭이 본격화되면서 김해 지역 사회는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을 위한 전진 기지가 됨으로써 정벌군의 동원과 전함의 건조, 군량 확보 등의 부담을 가장 많이 질 수밖에 없었다.
고려 후기 왜구의 침입은 다시한번 김해 지역 사회에 충격을 안겨 주었다. 김해 지역에 대한 왜구 침입은 13회 정도로, 경상도 연해 지역에서는 고성 지역과 함께 가장 많은 침입을 당한 곳이다. 1375년(우왕 1) 11월의 왜구 침입에서는 김해 지역 행정 중심인 관아와 성문이 모두 불타는 피해를 입었다. 왜구 침탈은 인명 살상, 촌락 파괴, 관청 방화, 농토의 황폐화, 인구 이동 등을 가져와 김해 지역 사회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조선시대]
조선 건국 후 김해 지역은 1413년(태종 13) 지방제도 개편 때에 김해부에서 김해도호부로 승격하였다. 김해도호부로서 읍격은 1895년 23부제 하에서 김해군으로 개편될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조선 전기 김해도호부에는 속현으로 웅신현(熊神縣)과 완포현(莞浦縣) 두 곳, 부곡으로 대산(大山)부곡과 천읍(川邑)부곡 두 곳이 소속되어 있었다. 웅신현과 완포현, 천읍부곡은 1451년(문종 1) 11월에 통합되어 웅천현(熊川縣)으로 편제되어 독립하였다.
김해도호부의 지방 행정은 면리제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조선 전기에는 방위면 체제로 운영되다가 조선 후기에는 지역명을 차용한 다수의 면이 등장하면서 면리제가 활성화되었다. 1789년 간행된 『호구총수』에서는 김해도호부의 면으로 상동면 등 20개 면을 소개하였고 각 면 소속의 동리로 모두 205개의 동리를 기록하였다.
조선 전기 김해도호부의 인구는 『경상도지리지』[1425년]에서 1,290호에 남자 6,642명, 여자 7,230명 총계 13,872명으로 기록하였는데, 조선 후기 『호구총수』[1789년] 단계에서 9,107호에 남자 15,750명, 여자 20,083명 총계 35,833명으로 증가하였다. 인구가 2.6배 가량 증가한 셈으로 여성 인구의 증가율이 높은 편이었다.
조선 초기 김해의 경지 면적은 『세종실록지리지』[1453년]에서 7,809결로 수전(水田)이 조금 적은 편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1780년대에 편찬한 것으로 보이는 『김해부읍지』에서는 김해의 경지면적이 한전(旱田) 4,360결 43부 3속, 수전 5,703결 64부 2속, 합계 10,064결 7부 5속이었다. 조선 초기에 비해 2천여 결 증가하였고, 수전의 비중이 높아져 있었다.
한편 임진왜란으로 김해 지역사회는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1592년 4월 19일에 김해성이 왜병에게 포위되어 김해부사가 성을 버리고 탈출한 후 1598년 11월 왜병의 철수까지 6년 7개월 동안 김해는 왜군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김해성 전투에서는 고을 선비인 송빈(宋賓)·이대형(李大亨)·김득기(金得器)·유식(柳湜) 등이 의병을 일으켜 대적하다 순절하였다.
임진왜란 후 김해 지역사회는 전후 복구사업을 추진하였고 지역 방어체제를 정비하였다. 김해의 재지사족들은 향안(鄕案) 작성을 강화하여 향촌사회를 재건하고 그들의 지배력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김해 지역의 크고 작은 섬과 강변에 형성된 저습지와 갈대밭에는 서울의 궁방과 아문이 설치한 둔전이 확대되고 있었다. 포구를 중심으로 소금 상인 등 선상(船商)의 활동이 활발하였으며, 읍내장, 신문장, 설창장, 생법장, 반송장 등 장시(場市)가 발달하였다.
[근대]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이 해 4월 김해 농민들은 공금유용 등의 문제로 지탄받고 있던 김해부사를 추방하며 항쟁을 벌였다. 을사늑약 이후에는 대한자강회, 대한협회, 교남교육회의 김해지회를 중심으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1895년(고종 32) 5월, 23부제 행정 구역 개편으로 김해도호부는 진주부 관할의 김해군이 되었다. 1904년의 『경상남도김해군가호안(慶尙南道金海郡家戶案)』에 따르면, 당시 김해군에는 24개의 면이 있었는데, 1906년에 대산면(大山面)을 창원군으로 이관하고 양산군 대저면(大渚面)을 편입하였다. 1914년 군(郡)제 개편에 따라 김해군은 종전 23개 면 143개 동리가 14개 면 134개 동리로 통폐합되었다.
일제강점기 김해 지역에도 헌병대 김해분견소와 15개소의 헌병파견소가 설치되어 무단통치 하에 들어갔다. 1910년부터 시작된 토지 조사 사업은 김해 지역도 주요 대상 지역이 되어, 농민들이 사유지로 이용해왔던 많은 토지가 국유지로 전환되고 말았다. 동양척식회사의 김해농장이 회현리에 설치되었고, 하자마[迫間]농장이 진영과 창원 일대에 만들어졌다.
일제는 중일 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전쟁 물자를 충당하기 위해 대규모 인적 물적 수탈 정책을 실시하였고, 국민정신총동원연맹과 국민총력연맹을 차례로 조직하여 동원 체제를 구축하였다. 이 때문에 김해 지역 주민들은 야간 군사 훈련, 사방 공사, 김해비행장 공사 등 각종 강제 동원에 시달렸다.
한편 일제의 무단 통치와 경제 수탈에 맞선 항일운동이 김해 지역에서도 활발하게 이어졌다. 1919년 3월 30일 밤 김해읍내에서 시작된 만세 운동은 하계면 진영리, 명지면 중리·진목리, 장유면 무계리, 김해면 이동리 등에서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청년 운동과 농민 운동도 활발하였다. 청년 운동은 김해청년연맹과 김해청년동맹 등의 항일 운동으로 발전하였으며, 농민 운동은 김해노농연합회, 김해농민연맹, 김해농민조합 등이 결성되어, 소작쟁의를 벌이면서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하자마농장의 소작 쟁의는 가장 치열했던 농민 운동이었다.
[현대]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가 설립되어 빠르게 전국으로 확산되었는데, 8월 말쯤 김해 지역에도 그 지부가 들어섰다. 건국준비위원회가 조선인민공화국으로 전환하자 김해 건국준비위원회 지부도 김해 인민위원회가 되어 군을 통제하고 치안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미군이 진주하면서 인민위원회의 역할은 부정되었으며, 집회나 시위가 강제 진압당하고 간부들은 검거되었다. 반면에 우익들이 단체 조직에 나서기 시작하여, 김해에서도 독립촉성회, 광복청년회, 서북청년회, 대한청년단, 민보단 등이 등장하였다.
6·25전쟁으로 김해는 피난민들의 집합처가 되었다. 1951년 1월 이후 김해에는 1만 명 이상의 피난민이 유입되었고, 피난민 구호 문제가 김해 지역 현안이 되고 있었다. 전쟁 기간 발생한 ‘국민보도연맹사건’도 김해 지역 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1950년 6월 28일부터 9월 18일 사이에 예비검속 대상이었던 1,220명이 모두 학살되고 말았다.
1960년 4·19혁명 당시 김해 지역에서는 김해농업고등학교[현 김해생명과학고등학교] 학생들의 시위를 시작으로 김해중학교, 김해여자중학교 등 지역 내 학생들이 거리로 나와 시위하였고, 정당으로는 김해 민주당이 시위를 주도하였다. 혁명의 성공으로 김해 지역에서는 양민 학살 사건 진상 규명 운동이 일어나는 등 새로운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1년 뒤 5·16쿠데타가 발생하여 김해 시민들의 열망을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1960년대 ‘모범부락조성사업’과 1970년대 새마을 운동으로 농촌안정화정책을 추진하였다. 김해의 새마을 운동은 환경 개선 사업에, 소득 증대 사업은 농업에 집중해 있었다. 1972년부터 1981년까지 10년 간 도시 기반 조성 사업이 전개되었다.
김해군의 권역에도 몇차례 변동이 있었다. 1981년 7월 1일자로 김해읍이 김해시로 승격됨에 따라 김해군과 김해시로 나누어졌다가, 이로부터 10여 년 뒤, 1995년 5월 10일 도농 통합 정책에 따라 김해군과 김해시가 통합되어 새로운 김해시가 되었다. 한편 김해의 동남쪽에 위치했던 몇 개의 면들이 부산으로 편입되었다. 1978년 2월 15일 서낙동강 강동 지역인 대저읍·명지면과 가락면 일부가 부산직할시 북구로 이관되었고, 다시 1989년 1월 1일부로 가락면과 녹산면이 부산직할시에 이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