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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400071
한자 人文 地理
영어공식명칭 Human Geography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경상남도 김해시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유태윤

[정의]

경상남도 김해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인문 지리적 요소.

[행정구역]

김해는 삼국 시대에는 금관가야(金官伽倻)로 불렸으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인 757년 경덕왕(景德王)이 지명을 정비하면서 김해소경(金海小京)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고려 시대에는 지명이 수차례 바뀌었는데, 임해현·금주(金州)·금녕 등의 이름과 김해라는 이름이 번갈아 가며 사용되었다. 그러나 1310년(충선왕 2)에 김해부가 된 이후부터는 지명의 변화 없이 지금의 김해로 이어질 수 있었다.

조선 후기까지 남쪽으로는 낙동강 하류, 북동쪽으로는 창원부 대산면[현 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대산면] 일대가 김해부에 속하였다. 1906년 김해군은 대산면을 창원군에 넘겨 주고 양산군에서 대상면과 대하면을 넘겨 받아 23면을 관할하였다. 1914년 4월 1일 행정 구역이 개편되면서 김해군은 14개 법정면[가락면, 좌부면, 우부면, 진례면, 장유면, 이북면, 하계면, 대저면, 녹산면, 주촌면, 상동면, 하동면, 생림면, 명지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1918년 7월 1일 좌부면과 우부면을 합쳐 김해면으로 하였고, 1931년 11월 1일 김해면이 김해읍으로 승격하였다. 1942년 10월 1일 진영면이 진영읍으로 승격하면서 김해군김해읍진영읍을 중심으로 하는 지역 체계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1944년 10월 1일 하동면이 대동면으로 개칭되었다.

광복 이후에는 이 체계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동쪽으로는 부산, 서쪽으로는 경상남도의 중심 도시인 창원과 접하여 이들 도시의 팽창이 상대적으로 김해 지역의 행정 구역 축소로 이어진 것이다. 또한 본래 농업 지역이었던 김해가 이 변화로 인하여 개발 제한 구역을 제외한 지역의 농경지가 공업 단지와 상업 용지로 전환되기도 하였다. 1973년 대저면이 대저읍으로 승격하였으나 1978년 2월 15일 대저읍이 명지면과 가락면 일부와 함께 부산직할시에 편입되었다. 1981년 7월 1일 김해읍이 시로 승격하면서 김해시는 부산직할시와 경상남도 일대의 도시 체계에 편입되었다. 1987년 1월 1일 이북면이 한림면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989년 가락면과 녹산면이 부산직할시에 편입되어 김해시의 지리적인 범위가 축소되었다. 1995년 5월 10일 김해군이 김해시에 통합되며 도농 통합 체제로 변환됨에 따라 동과 읍·면이 공존하게 되었다. 2013년 7월 1일 장유면이 행정동인 장유1동, 장유2동, 장유3동으로 분리 승격하면서 김해시의 행정 구역은 1읍[진영읍], 6개 면[주촌면·진례면·한림면·생림면·상동면·대동면], 12개 행정동[동상동·회현동·부원동·내외동·북부동·칠산서부동·활천동·삼안동·불암동·장유1동·장유2동·장유3동]이 되었다.

[김해 지리서와 고지도]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많은 지리지와 고지도가 편찬되었으며, 김해 지역의 역사·지리 내용은 이들 사료에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등에는 분산·신어산(神魚山)·구지봉 등이 실려 있는데, 이들 지리지에 모두 수록되어 있는 지명은 분산신어산이다. 이는 오래전부터 분산신어산김해부의 중심 산지로 인식되어 왔음을 보여 준다. 분산은 지금의 분성산이며, 김해 분산성(金海 盆山城)이 축조되어 있고, 가락국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전해지는 해은사(海恩寺) 등이 남아 있다. 또한 그 정상에는 김해천문대가 있다. 신어산은 김해시의 북동쪽인 삼안동과 상동면 묵방리, 대동면 예안리 일대에 걸쳐 있는 산이다. ‘신어(神魚)’는 인도 아유타국의 상징이자 김해 수로왕릉(金海 首露王陵)의 정문에 새겨진 새겨진 두 마리 물고기[쌍어(雙魚)]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조선 시대 신어산에는 기우단이 있었다고 전한다. 그 외에 지리지에 담겨 있는 산지로는 운정산[경운산], 자암산, 용제봉, 식산[무척산], 비음산 등이 있다.

조선 시대 이전에 제작된 『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부터 20세기 이병연이 편찬한 『조선환여승람(朝鮮寰輿勝覽)』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사료 속에 김해의 모습이 담겨 있다. 『조선환여승람』은 1910~1937년까지 전국 241개 군 중 일부인 128개 군의 지리 내용을 정리한 것으로, 체재는 조선 시대의 지리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내용은 『대동지지(大東地志)』를 따르고 있다. 이러한 역사·지리지는 김해 지역에 담겨 있는 과거의 흔적을 파악하는 기초 자료이며, 이는 과거 지리의 복원뿐 아니라 시대적인 변화 양상도 파악할 수 있게 한다.

김해부 지명이 기재된 고지도는 조선 전기에 만들어졌다. 조선 전기 지도의 경우 대부분 위치 정보의 묘사에 그치고 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 김해부의 상세한 지리가 그려진 군현 지도가 제작되기 시작한다. 19세기는 지도 제작 기술이 발달하면서 여러 형태의 지도가 만들어진 시기이다. 각 고을에서 감상용 지도가 지방 화원들에 의해 족자식 혹은 병풍식으로 제작되었고, 신미양요가 일어났던 1872년(고종 9)에는 전국적으로 상세한 지도가 제작되었다. 이 시기 김해의 모습이 담겨진 지도로는 「분성산성지도(盆城山城地圖)」, 「김해부내지도(金海府內地圖)」, 『청구도(靑邱圖)』,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등이 있다.

[자연 마을]

김해 지역에서는 일찍부터 벼농사가 시작되었으며, 근대 이후에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농업 지역이 되었다. 김해 동쪽의 낙동강 본류와 서낙동강 유역, 북서쪽 한림면, 진영읍진례면을 흐르는 화포천 유역과 대산 평야 일대가 농업의 중심이었으며, 이를 기반으로 자연 마을이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김해의 대도시화로 인하여 공장 지대와 농업 지역이 혼재됨에 따라 전통적인 자연 마을의 모습은 점차 사라지면서 도시적인 경관으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김해의 자연 마을은 대부분 농촌에 속하기 때문에 농업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그러므로 농경지와 가까우면서도 생활용수 공급이 용이하면서 동시에 배수가 원활하여야 한다. 이 때문에 자연 마을들은 가옥 배치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마을의 사회 공간 구성을 보면 초입부터 뒷산의 재실에 이르기까지 기승전결의 구조를 갖춘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한 마을 중심에는 회관, 경로당을 비롯한 공동체 공간이 있으며 노거수가 함께 있는 경우가 많다. 서낙동강 유역에는 김해 시내 지역과 칠산서부동, 장유3동, 주촌면이 있고, 화포천 유역에는 진례면·진영읍·한림면·생림면이, 낙동강 본류 유역권에는 상동면대동면이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이름은 김해 지역의 다양한 지리 환경을 반영한 지명을 차용하였다. 산지 지명을 빌린 마을로는 남산·전산·태정·장유 등이 있고, 계동·대골·내원골·부곡 등은 계곡을, 상점·광대연·고령·대현 등은 과거 교통로로 이용되었던 고개 이름을 빌려서 명명하였다. 그 외에도 농경지를 개척하면서 붙인 마을 이름도 보이고, 도로와 포구, 마을의 위아래, 관방과 관청, 그리고 역원의 이름을 빌린 마을 이름 등이 있다.

[인구]

김해의 인구는 광복 이후 꾸준한 상승세를 보이다가 1981년 7월 김해읍이 김해시로 승격한 이후 그 추세가 급상승하였다. 특히 1990년대 신도시 조성 사업으로 박차를 가하게 되었는데, 1993년 14만 8685명이었던 김해의 인구는 시군 통합 이후인 1999년에는 32만 8564명으로 급증하였다. 신도시 조성 사업과 택지 개발 사업 등 김해시의 자체적인 노력으로 2003년에는 인구수 40만 명을 돌파하여 경상남도 내에서는 창원시 다음으로 큰 도시로 자리매김하였다. 김해시 인구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으나, 신도시 조성 사업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2010년대 후반 이후 사실상 정체기에 들어갔다. 2019년 12월 31일 기준 김해시 인구는 56만 1468명이었으나 2021년 12월 31일 기준 55만 3719명으로 7,700여 명이 줄어들었다. 출생자 수는 사망자 수보다 100명 정도 많지만 전출이 전입보다 4,000명 정도 많았다. 반면 가구 수는 22만 5984가구로, 2019년의 21만 7228가구보다 늘어났다. 남성은 28만 3149명, 여성은 27만 570명으로 남성이 여성보다 많은데, 이는 공업 단지가 늘어나면서 남성의 일자리가 많이 창출된 것과 관련이 깊다. 읍면동별 인구의 경우 북부동이 2021년 기준 8만 1037명으로 가장 많고, 내외동[7만 4511명], 장유3동[7만 3305명] 순이다.

[세거 성씨]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조선 전기 김해 지역의 토성(土性)으로는 김(金)·허(許)·배(裵)·손(孫)·송(宋)·유(庾) 6성이, 내성(來姓)으로는 해주 정씨(海州 鄭氏)와 장양 맹씨(長陽 孟氏) 2개가 있었다. 조선 후기로 오면서 김해의 성씨 구성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는데, 1730년대에 간행된 것으로 보이는 김해의 읍지 『분성여지승람신증초(盆城輿地勝覽新增抄)』 성씨조에는 모두 29개의 성씨가 수록되어 있으며, 1929년에 간행된 『김해읍지(金海邑志)』 성씨조에는 90개의 성씨가 수록되어 있다.

[경제]

김해시는 오래전부터 낙동강 하류를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농업 생산지였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광복 후의 원조 경제, 1960년대 경제 개발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산업의 중심은 농업이었다. 그러나 1968년 한일합섬이 김해 지역으로 들어오면서 지역 경제가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1970년대에는 한일합섬을 중심으로 안동공단에 공장들이 들어서면서 경제가 성장하였다. 김해 지역의 공업화는 1980년대 이후 가속화하였다. 한일합섬 김해공장의 규모가 더욱 커졌고, 흥아타이어와 국제상사 등 대기업 공장들이 입지하였다. 1990년대부터는 금속과 기계 소재, 부품 산업이 지역 경제의 성장을 가져왔다. 2010년 드디어 지역 경제 생산의 50%를 제조업이 담당하는 공업 도시 김해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김해시는 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경상남도 창원시와 함께 동남 광역 경제권의 중심지로서, 이들 국가 산업 단지에 있는 거대 기업들과 협력 관계에 있는 중소 사업체가 밀집한 공업 도시이다. 2010년대 후반부터 성장의 속도가 느려지기는 했지만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교통]

김해시는 조선 시대 동남 지역의 교통 요지로서 서쪽으로 창원도호부를 잇는 자여도가 있었는데, 이는 동쪽으로 양산을 거쳐 한양과 동래부로 연결되는 영남로로 이어졌다. 북으로는 낙동강의 나루를 거쳐 밀양도호부로 연결되었다. 김해에는 이들을 잇는 도로상에 역원이 발달하였고, 북동쪽의 낙동강 연안에는 나루터가 형성되었다. 또한 이 낙동강을 건너면 경상좌도 군현과 이어지기 때문에 하천 연안에는 불암진, 덕산진 등을 중심으로 적지 않은 물자가 오갈 수 있었다.

김해시를 지나는 고속국도는 동서 방향으로 전라남도 영암군과 부산광역시 북구를 잇는 남해고속도로[고속국도 제10호선], 김해시와 부산광역시 사상구를 잇는 남해제2고속도로지선[고속국도 제104호선], 경상남도 창원시와 김해시를 잇는 남해제3고속도로지선[고속국도 제105호선], 김해시와 부산광역시 기장군을 잇는 부산외곽순환고속도로[고속국도 제600호선] 등 4개 노선이 있다. 김해시를 통과하는 철도와 경량 전철로는 경전선과 부산신항선, 부산-김해경전철이 있다. 그중 경전선은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읍에 있는 삼랑진역과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에 있는 광주송정역을 연결하는 총 길이 277.7㎞의 철도로 마산선, 진주선, 광주선을 통합한 노선이다. 김해시에서 경전선의 역으로는 한림정역, 진영역, 진례역이 있다. 부산-김해경전철은 부산광역시 사상구 괘법동의 사상역과 김해시 삼계동의 가야대역을 연결하는 경량 전철로, 국내 최초로 운영된 민자 경전철 사업이자 부산도시철도 4호선에 이어 국내에서는 두 번째로 개통하였다.

[참고문헌]
  • 『김해시사』 1(김해시사편찬위원회, 2024)
  • 김해시청(https://www.gimhae.go.kr)
  • KOSIS 국가통계포털(https://kosi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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